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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택대출, 이러다 큰 일 납니다” |우리동네이야기

2007-03-1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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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아이러브 행복한 부자 만들기

원문출처 : http://blog.drapt.com/koyongso

“주택대출, 이러다 큰 일 납니다”
[국정브리핑 2007-03-12 18:07]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두번째 주제로 <안정적 주택공급 정책>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안정적 주택 공급>
①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1
②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2
③ 부동산과 택지조성의 방정식
④ 서민 내집 마련을 위한 금융지원

2003년 2월, 참여정부의 첫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내정된 김진표 씨의 집무실로 변양호 금융정책국장과 신제윤 금융정책과장이 찾아왔다. 이들의 첫 대면 업무보고의 핵심내용은 ‘주택대출 만기구조의 장기화’였다.

“외환위기 이후 시중은행들이 앞 다퉈 주택담보대출에 뛰어들면서 주택금융 이용도는 현격히 높아졌지만 대부분 3년 만기 변동금리 대출이다 보니 안정성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금리 상승이나 집값 하락으로 가계의 채무불이행 위험이 높아지면 또 다른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우려가 있습니다.”

신 과장(현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이 제시한 해법은 두 가지. “3년 위주로 돼 있는 주택담보 대출을 20년 이상 장기 고정금리 대출로 전환해 가계의 채무상환능력을 높이고, 또 급증한 금융권의 주택저당채권을 시장에 원활히 유통시켜(유동화) 금융기관의 위험도를 줄여줘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전담할 공신력 있는 기관으로 ‘한국주택금융공사(가칭)’를 설립하는 방안이 보고됐고 김 내정자로부터 “좋은 아이디어다. 그대로 추진하자”는 지시가 내려졌다.

단기변동 금리 ‘싹쓸이’ 주택금융 우려 확산

당시 재경부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위원회 등 금융정책 당국으로서는 취약한 단기 변동금리 주택대출 급증이 골칫거리였다. 시민단체와 학계·전문가 그룹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시 KoMoCo(주택저당채권유동화회사) 유동화 팀장이었던 이중희 박사(현 한국주택금융공사 조사부장)는 “옛날 주택은행이 국책은행이었을 때는 주택대출이 장기 분할상환이었으나, 외환위기 이후 단기 일시상환대출로 급격히 바뀌었다. 1998년만 해도 신규 취급 대출의 4분의 3이 20년 이상 장기대출이었으나 2002년 1분기에는 정반대로 3년 이하 단기 대출이 약 4분의 3이나 차지했다”며 “시중은행이 단기 변동금리로 ‘싹쓸이’ 해버린 주택대출시장에 대해 참여정부 출범 직전인 2002년 말부터 ‘이러다 큰 일 난다’는 우려가 폭넓게 형성됐다”고 회고했다.


재경부의 의뢰로 건국대 사회과학연구소 고성수 교수가 분석한 보고서(2003년 9월)는 “주택담보대출 증가분 중 만기 3년 이하 단기 일시상환 형태의 대출이 77%에 달해 향후 경기변동에 따라 주택대출 부실화 및 금융기관 부실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며 “이 같은 한국의 대출구조는 미국의 대공황기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던 단기일시상환형 대출과 유사하다”고 경고했다.

“주택금융공사법이 통과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취약한 주택대출구조에 따른 금융 위험을 낮추고, 장기 고정금리로 주택구입자금을 빌려줘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기회를 넓히기 위해 ‘주택금융공사’라는 별도 기관을 설립하는 방안은 그해 3월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참여정부 첫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보고됐고 곧바로 공식 발표됐다.

이어 2003년 9월9일 국무회의.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그해 정기국회에 제출될 한국주택금융공사법에 대해 설명하고 법안에 대한 국무회의 의결이 끝나자 노무현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며 각료들에게 당부했다. “이 법안은 주거안정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고 나아가 부동산 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대표적인 민생법안인 만큼 통과될 수 있도록 전 각료들이 노력해 주십시오.”

서민들 내 집 마련에 ‘물꼬’

노 대통령의 지적대로 주택금융공사법안의 목표는 “서민·중산층 주거안정을 위한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고 부동산 안정에 근본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주택금융공사를 2004년 1월 설립하는 것이었다.

주택금융공사는 은행 등 금융기관을 통해 장기 주택자금을 대출하면서 생기는 주택저당채권을 현금으로 사들이고, 이를 담보로 주택저당증권(MBS:Mortgage-Backed Securities)을 발행해 이를 채권시장에 유통시켜(유동화) 보험사나 투신사·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로부터 장기자금을 조달해 다시 서민들에게 장기 주택구입자금인 모기지론을 공급한다. 주택금융공사가 발행하는 MBS는 국가기관이 하는 만큼 신용도가 높고 한도가 자기자본의 50배까지 발행할 수 있어 공사의 자본금이 2조원으로 확충될 경우 최고 100조원의 주택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

주택금융공사가 설립되면 10년 이상 장기 주택구입자금을 대출 받을 수 있어 서민·중산층의 내 집 마련 기회를 촉진하게 된다. 당시 재경부의 시뮬레이션으로는 월 소득 250만원인 직장인의 경우 월 68만원을 부담(20년 만기 1억원 대출, 세제혜택 감안)하면 1억5000만원 수준의 25평형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2004년3월2일 한국주택금융공사 출범 및 현판식에 이헌재(왼쪽)경제부총리와 박승(오른쪽) 한국은행 총재가 함께 입장하고 있다

그해 9월 국회에 제출된 법안은 정기국회 파행으로 12월29일 본회의를 통과했고 이듬해인 2004년 3월2일 주택금융공사가 출범했다. 2006년6월까지 주택금융공사는 총 11만1000가구에 10년 이상 장기 고정금리로 8조원의 주택구입자금을 지원했다.

장기 저리의 주택구입자금 대출 제도가 성숙되지 않아 내 집을 마련하지 못했던 서민들에게 ‘물꼬’가 트이고, 금융기관의 과잉경쟁으로 뒤틀린 우리나라 주택금융시장을 바꾸는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1967년 주택은행에서부터 2004년 주택금융공사 설립까지 서민의 내 집 마련을 위한 자금 지원과 주택건설 위한 주택금융의 뒷자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분양권 쥔 주택은행

개인이 집을 사려고 할 때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건설업체들이 주택을 짓는데 자금을 대주기도 하는 역할(주택금융)은 1967년부터 30년 가까이 ‘한국주택은행’이라는 단일 국책은행의 몫이었다.

국민은행과 합병돼 지금은 간판이 사라진 주택은행은 일반 저축자들의 예금과 주택저축을 통해 자금을 끌어들이고, 금융시장에서 주택채권을 발행해 돈을 조달한다. 여기서 나온 자금을 운용해 일정한 의무비율을 주택공급자와 수요자에게 대출해준다.

특히 주택은행은 신축주택의 우선분양권이 부여되는 청약예금과 청약부금, 대출우선권이 부여되는 주택부금을 단독으로 취급해 여기서 조달된 재원을 독점적으로 ‘장기·저리’로 주택부문에 다시 투자해왔다. 일반 시중은행들은 산업자금 공급을 위해 법적으로도 오랫동안 주택관련 금융을 취급하는 것이 제한됐다.

‘모든 돈은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1960년대 산업화와 도시 인구팽창에 따른 땅값 상승과 주택수요 증가는 소득 수준이 낮은 서민들로 하여금 주택소유를 더욱 어렵게 했다. 장기저리의 주택자금을 풍부하게 조성해 집 없는 서민들에게 공급하는 등 주택금융에 대한 정책적 노력이 절실했지만 당시 저축능력 부족에다 정부 재정으로 충당되는 주택자금이 투자재원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예산 규모 대비 주택자금의 규모는 미미했다.

1957년 한국산업은행이 처음으로 주택자금 융자를 시작한 이래 1966년 말까지 10년간의 주택자금 대출액은 54억원, 주택수로는 4만8698가구에 불과했다. 주택부문이 정부의 공업화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국민총생산 대비 주택투자율은 1.7%에 지나지 않았다.

바닥 난 주택금고

1967년 설립당시 주택금고 모습 <사진:주택은행 30년사>
이 때문에 1960년대 중반부터 민간자금을 자체적으로 조달하여 주택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공급 관리할 수 있는 주택금융 전담기구의 설립 필요성이 높아졌다. 당시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따른 83만 가구 주택건설과 주택투자자금 345억원 조성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주택금융 전담기구 설립이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1965년부터 정부는 서민주택 자금 조성을 뒷받침하고 주택자금의 효율적 공급과 관리를 위한 ‘주택금고’ 설치를 추진해 국회 논의를 거쳐 1967년 7월10일 한국주택금고가 문을 열었다. 이어 민간자금 조달 기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은행으로 만드는 작업이 이뤄졌고 1969년1월 한국주택은행법이 제정 공포돼 ‘금고’는 ‘은행’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당시 신문(68년12월26일자 조선일보)은 이렇게 소개했다.
“지난 10월말 금고 바닥이 드러나 주택자금 융자를 중단하고 일찌감치 동면에 들어갔던 주택금고가 24일 주택은행으로 간판을 갈아달면서 새로 활기를 띠기 시작.
주택금고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날 주택금고(이제부터 주택은행)는 바깥 간판만 아니라 이사장실의 팻말도 즉각 은행장실로 바꾸는 등 아래 위 없이 온통 축제 분위기.
지금까지 정부예산에만 매달려온 주택금고가 은행으로 바뀌면서 한은차입뿐 아니라 외자(달라)로 액면을 쓴 주택채권까지 발행하게 되어 내년부터는 자금부족의 염려가 없게 됐다는 것.
(중략) 내년에 적어도 주택금고 발족 이래 16개월 동안의 총 대출액 70억원보다 30억원이 많은 1백억원 정도의 주택자금을 융자, 서민주택(20평 이하) 2만채를 짓도록 하겠다는 주택은행은 요즘 전례 없이 방대한 새해 사업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는 듯.”

꽹과리 치며 복권 팔아 자금마련

주택금고가 금고라는 명칭과 점포수 제약 등으로 인해 선발 은행과의 경쟁이 어려워 예수금보다는 자본금과 정부 차입금에 크게 의존했지만 주택은행으로 변경된 후에는 1969년9월 주택복권을 발행하는 등 자금 조달의 폭을 서서히 넓히기 시작했다.

주택금고 행원으로 출발해 주택은행장까지 역임한 김재기 전 행장(현 씨름연맹 총재)의 증언. “복권은 불특정 다수의 소액 소비자금을 모아 투자자금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당시 취약한 주택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선진국 형태의 복권을 도입했다.

재무부 장관 승인에다 첫 회 서울시장 허가까지 받아 그해 9월15일부터 29일까지 15일간 100원권 50만매를 발행했지만 그 때만 해도 복권이 무엇인지 모르는 때여서 잘 팔리지 않았다. 급기야 주택은행 전 직원이 가두판매에 나서 서울역 앞에서 모판을 메고 꽹과리를 치며 복권을 팔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택복권 판매액은 국민주택기금으로 편입돼 서민주택 건설 자금으로 쓰였다. 숫자가 적힌 동그란 과녁에 화살을 쏘는 형태의 추첨을 통해 나온 1등의 당첨금은 300만원. 당시 단독주택의 평균가격이 90만원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꽤 높은 당첨금이었다.
서울시장의 허가를 얻어 발행된 1회 주택복권은 액면 100원에 1등 당첨금이 300만원이었다.

1970년 초 주택복권 판매기금 1억원으로 서울 암사동에 파월장병·군경유가족·일반원호대상자·이재민을 위한 ‘복권 아파트’라는 이름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으며, 그해 2월21일 <대한뉴스>는 남덕우 재무무장관의 복권아파트 기공식 행사 소식을 전하면서 ‘복권아파트’ 입주자들이 “낮은 이자와 장기 상환혜택을 받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1억원짜리 올림픽복권

88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1983년 4월부터 주택복권 대신 최고 당첨금 1억원의 올림픽 복권이 대신 발행됐다. 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1억원 기대심리로 발행 초기 발매 1~2일 만에 매진되는 등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올림픽복권을 통해 조성된 자금 1827억원 중 국민주택기금에 639억원, 올림픽 기금에 1188억원을 지원했다. 올림픽 기금에 지원한 금액은 전체 올림픽 사업비 9098억원의 13%에 달했다. 끊임없는 사행심 조장 논란 속에서도 1969년부터 1997년6월까지 주택복권의 총 판매액은 1조6900억원에 달했으며 당첨금 및 발행비용을 차감하고 판매액의 38.9% 정도인 6568억원이 국민주택기금으로 조성됐다. (주택복권은 2006년1월5일, 도입된지 36년 만에 로또에 밀려 사라졌다.)

건설업자에게 빌려주는 국민주택기금 탄생

1990년대 주택은행 여의도 본점 전경
정부는 1972년 12월 주택건설 250만호 건설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기존의 공영주택법을 폐지하고 주택건설촉진법을 제정했다. 이법을 근거로 1973년부터 재정자금과 국민주택채권 및 주택복권 발행을 통해 조달되는 ‘국민주택자금’이 만들어졌다.

이 때부터 발행된 국민주택채권은 주택건설촉진법이 정하는 매입의무자가 일정 기준에 따라 강제 매입토록 돼 있어 매년 발행실적이 크게 늘어나 1980년 말까지 3688억원의 자금조달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주택건설 물량은 매년 15만호 안팎으로 계획물량을 크게 밑돌았다. 건설업자에게 국민주택을 더 많이 짓도록 장려하기 위해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기(20년)·저리(7.5~9.5%)의 자금을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81년 국민주택자금을 주택은행 계정에서 별도로 분리해 독립된 공공기금인 ‘국민주택기금’으로 전환하면서 공공과 민간의 역할 분담체제가 확립됐다. 국민주택기금의 지원대상은 임대주택 또는 전용면적 25.7평 이하 국민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자이며 완공 때 입주자로 대출이 전환됐다.

아파트 열풍과 주택청약예금

1970년대 후반 아파트에 대한 선호도가 급증하고 투기가 기승을 부리자 건설교통부는 민영아파트 공급 질서를 확립하고 투기억제 및 주택자금 재원 조성을 위해 ‘주택청약정기예금제도’를 마련 1978년 2월4일부터 서울 부산 대구에서 우선 시행했다.

1983년 주택경기 호황과 아파트청약 0순위제 폐지 채권입찰제 실시 등으로 주택청약 정기예금의 신규가입이 크게 늘어나고 주택부금이 높은 신장세를 보였다. 반면 1984년 주택경기 진정을 위한 강력한 투기억제정책으로 하반기 주택경기가 침체하자 주택청약 예금과 국민주택기금 일시 예치금 해약이 급증하기도 하는 등 주택자금 조달 규모는 부동산 경기에 따라 등락을 거듭했다.

1987년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이 신설돼 담보능력이 미약한 근로자 등을 대상으로 신용을 보증해줌으로써 주택자금이 보다 원활하게 지원되도록 했다. 주택보증신용보증기금은 1991년 말 기준으로 30개 금융기관과 보증계약을 체결했고 40만4000가구 1조5930억원의 보증을 지원해 무주택 서민의 주택마련 기회를 제공했다.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이 신설되면서 주택은행은 국민주택기금과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 등 2개 기금까지 관리하는 ‘주택금융 그룹’이 됐다.

200만호 건설에 돈을 대라

주택200만호 건설을 공약한 6공화국은 막대한 주택건설 자금 조성에 골몰해야 했다. 주택금융 확충을 1면에 보도한 1987년 11월 11일자 조선일보화면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1987년. 대통령 선거를 한달 여 앞둔 11월10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기자간담회를 갖고 경제정책 공약을 발표했다.

6대 원칙과 6대 시책으로 요약된 경제 공약중 하나로 ‘내 집 시대의 조기실현’을 들고 “이를 위해선 국민주택금융을 앞으로 5년간 2조원이상으로 늘리고 값싼 공공개발택지를 3천만평 이상 공급, 주택건설 단가를 인하토록 하여 누구나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고 앞으로 250만 무주택 가구에 정부지원을 집중하여 향후 5년간 50만 채의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는 등 92년까지는 모든 국민들이 내 집을 갖는 시대를 맞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다음날 신문은 ‘주택금융 2조 확대’라는 제목을 큼지막하게 1면에 뽑아 노 대표의 정책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하지만 당시 ‘주택금융’이라는 말과 ‘2조원’이라는 돈은 사람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다만 ‘모든 국민들이 제 집을 갖는 시대’라는 구호만 머릿속에 남았다.

이렇게 시작된 주택 200만호 건설은 주택자금 수급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도시 건설을 위해 시중 부동자금을 주택건설 재원으로 흡수하는 방안이 총동원됐다. 다시 김재기 전 주택은행장의 회고.

“주택 200만호 건설을 위한 자금동원은 주택은행이 전담했다. 200만호 주택건설계획의 자금 지원을 위해 그해를 ‘총력수신증강의 해’로 정하고 자금조달의 극대화를 위해 전 은행차원의 저축증강 운동을 펼쳤다. 이에 따라 1991년 5월15일 주택은행 예수금이 10조원을 넘어 총예수금 1위 은행자리를 차지했다. 은행장 직속으로 ‘주택금융특별기획실’을 설치하고 여기서 만든 주택금융확충방안에 따라 200만호 건설 계획 중 민영주택부문에서 82만호 건설을 위한 자금 지원을 주택은행이 도맡았다.”

'차세대 주택통장' 한국판 기네스북 올라

200만호 건설 당시 주택은행을 통해서만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매년 2조원에 가까운 돈이 주택건설에 지원됐다. 건설업자 지원확대, 개인주택 구입자에 대한 대출금 상향, 신청자격 완화, 대출제도 개선 등 주택금융 활성화 방안이 잇따라 나오고 아파트 중도금 납입자금, 임차자금, 다가구단독주택 건설자금, 주거환경개선사업자금, 조립식주택설비자금대출 등 새로운 대출제도도 이때 대거 쏟아져 나왔다.

당시 주택건설 붐을 타고 1992년 30년 정도 저축하면 내집 마련을 할수 있는 차세대주택종합통장은 발매 1달만에 100만명이 가입할 정도로 선풍적 인기였다. 이 주택통장은 1993년2월 최단 기간내 최다 가입자 금융상품으로 한국판 기네스북에 올랐고 1993년에는 단일 상품으로는 드물게 300만계좌를 돌파했다. 당시 우리국민들의 ‘저축을 통한 내집마련 꿈’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그 결과 주택은행은 창립 24년만에 1991년말 직원수가 1만2000명에 이르고 282개 점포를 가진 총 예수금 10조3372억원에 이르는 초대형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래도 모자라는 주택자금

갈수록 수요가 커지는 주택금융의 확충을 위해서는 주택자금 취급기관을 다변화하고 전문기관(은행 보험 새마을금고)을 적극 육성하며, 서구식 주택저당증권제도(MBS) 도입을 통해 중산층 이상의 여유자금을 주택자금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높아져갔다.

주택200만호 건설 과정에서 만성적인 주택자금 부족현상을 경험한 정부와 주택은행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주택자금 조달방안 마련에 골몰했다. 그 결과 대안으로 검토한 것이 바로 현재의 주택금융공사가 하고 있는 주택저당채권 유동화(MBS)다.

주택금융공사 이중희 박사는 “자본시장의 여유자금을 주택부문에 활용하는 선진국의 MBS제도는 정부 입장에서 솔깃한 대안이 아닐 수 없었다”며 “하지만 경제적·법률적 장애요인으로 인해 MBS 제도는 도입되지 못하고 그후 10여년 동안 조사연구와 논의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고 했다.

주택저당 채권을 시장에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채권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높아야 하지만 당시에는 국가가 정잭적으로 대출금리를 조절하던 시기여서 오히려 채권시장의 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더 쌌다. 이같은 구조에서는 MBS를 도입해도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또 법률적으로도 저당권을 양도하는데는 당시 민법상 큰 장애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 이후 IMF(국제통화기금)의 금융구조개혁 권고에 따라 국민의 정부가 1999년 주택저당채권유동화회사법이라는 특별법을 만들어 법률적 장애를 극복하고, 채권금리 등 금융시장이 시장원리에 따라 작동하면서 2000년 KoMoCo(주택저당채권유동화회사)를 세워 처음으로 MBS를 발행하게 됐다. 하지만 일반 기업형태의 유동화회사로는 공신력이 낮아 MBS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배급제도인 주택자금대출

MBS와 같은 장기 주택자금 조달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단기성 예금을 유치하는 형태로 자금을 모아 장기 저금리 주택자금을 공급한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개인이 자기 집을 취득할 수 있도록 주택 구입자금 대출만 전담하는 금융기관이 존재지만 우리나라에는 주택금융공사가 출범하기 전까지 이 같은 형태의 금융기관이 없었다.

주택은행의 개인주택구입자금 대출은 만성적 재원부족 때문에 청약부금이나 예금·저축을 가입한 사람에게만 자격이 주어졌고 엄격한 가입순위와 조건을 따져 일정 한도의 돈을 ‘배급해주는’형태여서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1967년 초창기 개인 주택구입 대출 대상은 무주택자로 신축 후 1년 이내의 주택을 건설업자로부터 최초로 매입하는 사람으로 한정됐으며 대출한도는 주택부금 가입여부에 관계없이 60만원이었다. 그러나 1975년부터는 대출 대상자가 주택부금 가입자로 한정됐고 1978년에는 대출기간이 20년으로 늘어났다.

1997년 발간된 ‘주택은행 30년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87년 3월에는 개인주택구입자금의 대상주택 경과년수를 신축 후 5년에서 10년 이내로 완화하는 등 실수요자 위주로 지원대상을 확대했다. 1987년 5월에는 근로자의 주거안정과 목돈마련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 근로자저축제도를 신설해 전 은행에서 취급토록 해 사실상 모든 은행에서 주택자금 대출을 취급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1989년 1월부터 중도금납입자금 대출이 시행되고 1995년 10년이 넘은 주택에 대한 대출도 허용되면서 개인 주택자금 대출은 크게 증가했다.”

주택은행이 1967년부터 1996년까지 30년 동안 공급한 주택자금은 22조4934억원으로 주택 수로는 207만 가구에 해당한다. 이중 개인의 주택구입 자금 지원은 15조617억원이었다.

나머지 자금은 주택을 공급하는 건설자금으로 쓰였다. 경기진작과 건설경기 부양이 필요할 때는 건설업체에 대한 돈줄을 늘리고 정부가 건설경기 진정책을 추진하면 건설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억제하는 형태였다. 주택경기가 침체할 때는 건설업체 자금난을 완화하고 주택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건설업자 운전자금과 미분양주택 구입자금을 대출해주기도 했다.

분양 주택 돈 많은 계층에게만 돌아가

그렇다면 이 같은 자금 지원으로 많은 서민들이 자기 집을 마련했을까?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는데 자기 집에 거주하는 비율은 55.6%.’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일반가구의 자가거주율은 1970년 71.7%였으나 1990년 49.9%로 하락했다가 2005년에는 55.6%에 머물렀다. 절반 가까이 전월세를 살고 전세비율은 1975년 17.6%에서 2005년 22.4%로 오히려 높아졌다. 전세로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주택구입 자금 대출을 통해 자기 집을 못 사는 것일까?


주택도시연구원 박신영 선임연구원의 분석은 이렇다.
“자가거주율이 낮은 것은 장기저금리 주택자금을 대출해주는 제도가 미성숙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의 50% 이상의 자금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전세로 주택을 임차한 가구가 주택을 사기는 쉽지 않았다. 만일 정부가 주택자금을 많은 사람들에게 장기저리로 대출해주는 제도와 더불어 많은 신규주택을 공급했더라면 전세거주자중 자가를 취득한 가구가 많아졌을 것이다. 주택자금 대출제도가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전세거주자는 자가를 취득하지 못한 채 매년 인상되는 전세보증금을 마련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1982년 이후 2004년까지 신규로 공급된 1090만가구의 주택은 주택자금 대출 없이도 집을 살 수 있었던 계층에게만 돌아갔다.”

외환위기와 2000년 이후 주택금융 무한경쟁 시대

금융시장 자유화와 개방, 그리고 곧이어 외환위기로 금융환경이 급변하면서 서민 주택자금 대출의 ‘문턱’은 대폭 낮아졌지만 ‘가계 부실 우려’라는 또 다른 문제를 잉태했다.

1997년 이후의 금융 국제화와 금리 자유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주택은행의 민영화 추진도 빨라지면서 주택은행의 주택금융 독점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일반 상업은행들의 주택금융시장 진입과 은행간 경쟁도 본격화됐다. 1997년 주택은행 민영화를 계기로 주택금융시장은 정책논리보다는 시장원리를 중시하기 시작했으며 외환위기를 계기로 더욱 빠른 속도로 시장 중심적 체제로 변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은행의 자산운용에서 비중이 낮았던 가계대출이 기업들의 부도 등을 계기로 안정적인 자산운용처로 서서히 인식되기 시작했다. 기업대출의 부실우려가 높아지면서 기업대출을 줄이는 대신, 마땅한 자산운용처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저금리와 부동산경기 상승이 맞물리면서 담보가 확실하고 수익률도 높은 가계대출을 늘리게 된다.

2001년과 2002년 중 주택담보대출은 매해 50%이상 성장하였고 그 결과 2000년 말 54.2조원에 불과하던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은 2006년 상반기말 200조8000억원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부동산 투기자에게 종자자금 제공”

박원석 대구대 부동산학과 교수가 ‘주택문제의 해법’(삼성경제연구소, 2005)에서 ‘건전하고 효율적인 주택금융시스템 구축’을 주제로 내놓은 지적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주택담보대출 구조의 문제와 결합하여 주택담보대출의 활성화가 주택시장의 안정보다는 오히려 주택시장의 단기 변동성을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략) 다시 말하면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살려놓은 금융기관들이 부동산 투기자들에게 종자자금을 제공하는데 골몰하고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주택금융의 활성화가 정책의 목표였다면 이제는 주택금융시장의 연착륙, 주택금융 시장의 건전화가 우선적인 정책목표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주택금융공사의 성과와 한계

이 같은 단기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의 급증은 저금리에 따른 통화량 증가와 부동산투기 열풍이 맞물린 결과다. 아무리 높은 이자에 단기 대출을 받아도 3년 만 지나면 집값이 ‘화끈하게’올라 대출금을 갚고도 남는 구조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었다.

금융연구원 이명활 연구위원은 2006년 말 내놓은 연구자료에서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시장금리 연동 변동금리 대출비중은 98%에 이르고 있다. 만기연장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거나 금리급등으로 이자부담이 가중될 경우 부실화될 우려가 있는 등 여전히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홍식 전 주택금융공사 사장은 2007년 초 매일경제와의 신년인터뷰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이자만 내다 2~3년 뒤 집값이 오르면 일시에 상환해도 되는 주택대출 시스템으로는 집값을 잡기 힘들다”며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장기 고정금리 대출 비중이 전체 주택대출 중 70% 이상으로 늘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택자금, 모자라도 '문제' 남아도 '탈'

주택구입을 위한 장기 모기지론이 서민들에게 보다 폭넓게 확산되지 못한데 대해 주택금융공사 설립 준비단계에서 테스크포스(TF) 팀장을 맡았던 박병섭 부장은 “그 동안 우리 금융시장의 유동성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은행들이 돈이 남아 대출 할 곳이 없어 가계대출에 집중하는 상황에서 주택금융공사의 20년 장기 모기지론을 팔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은행의 돈으로 주택담보 대출을 파는데 바빴다. 은행에 돈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은행 입장에서 장기모기지론을 대출해주고 그 채권(주택저당채권)을 주택금융공사에 팔아 현금을 가져가야 하는데 돈이 남아돌다 보니 그렇게 할 유인이 낮았다.”

박 부장은 “주택금융공사 출범 이후 은행들도 자체적으로 20년 상환 상품을 만드는 등 주택자금 대출 구조가 서서히 장기 구조로 전환되고, MBS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3년물 중심이었던 채권시장이 장기물 유통구조로 바뀌고 있는 것은 긍정적 변화”라고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서민 내 집 마련을 위한 자금지원이 바늘구멍처럼 좁았던 것은 돈(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주택금융 시장에 경쟁체제가 도입되면서 자금부족 문제가 해소되고 소비자들은 내 집 마련을 위한 주택자금을 쉽고 싸게 대출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돈이 풍부해진 저금리시대에는 지나친 경쟁과 단기 변동금리대출 편중으로 인해 또 다른 부실 위험을 안게 됐다.


뒤틀린 주택금융시장을 바로잡는 ‘씨앗’

이 두 가지를 해소해 ‘보다 풍부한 재원으로 보다 많은 서민에게 장기간 고정금리로 안정되게’ 주택구입자금을 지원해주려는 정부의 노력은 이제 첫 단 추를 끼웠을 뿐이다. 주택금융공사 이중희 박사는 “담보가치 위주의 주택담보대출 심사체계를 차입자의 채무상환능력 위주로 전환하기 위해 총부채상환비율(DTI: Debt-To-Income) 규제를 도입하고,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대손충당금 적립기준을 강화하는 등 주택담보대출의 선진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단기 변동금리 위주로 급팽창한 주택담보대출시장이 초래할 수도 있는 잠재적 금융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이 결실을 거둘 경우 우리나라의 주택금융시장의 구조가 한결 튼튼해져 집값 하락이나 금리 상승과 같은 외부적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기 고정금리 대출과 이를 기초자산으로 한 MBS 발행이 활성화됨으로써 자본시장의 발전을 촉진하고 주택가격의 안정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3월6일 경제전문 미디어 <이데일리>는 ‘e-모기지론 인기몰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송고했다.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꾸준히 오르면서 고정금리 장기대출상품인 ’e-모기지론‘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주택금융공사는 지난 2월 e-모기지론이 1592억원 가량 판매돼 전체 보금자리론 판매액 중 57.2%를 차지했다고 6일 밝혔다. 이는 전월비 25.5% 증가한 것으로 지난해 7·8월 두 달간 판매실적을 합친 1080억원보다도 절반이상 늘어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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