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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신화 일군 \'철의 사나이\' 박태준 |기타도움되는 말...

2011-12-1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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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3일 별세했다. 사진은 당시 포항제철 초기사장 재직시절 모습.

 

13일 타계한 청암(靑岩)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군인이자 정치인이기도 했지만 '포철신화'를 통해 철강산

업을 일으킨 '철의 사나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정계에서도 4선 의원에 국무총리까지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경제인으로서 남긴 발자취가 더 뚜렷하기 때

문이다.
 

1927년 9월 29일 경남 동래군 장안면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에서 성장해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나 인연을 쌓은 것도 이때였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정계에 잠시 발을

들여놓았던 고인은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이듬해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경제인으로 변신했다.
 

고인은 만성 적자기업이었던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바꾸었고, 1968년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게 평

가한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자본은 물론 경험이나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제철소 건설작업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조직된 국제차관단이 차관 공여를 철회하면서 건설 계획이 무산 위기에 놓이

기도 했지만, 고인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하자는 발상을 내고 이를 성사시켜 1970년 착

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난 1973년 6월9일 포스코 1기 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며 만세부르는 박태준 사장(가운데).

 

 

 

이 때문에 고인은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다.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우향우 정신'은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공급함으로써 국가의 은혜에 보

답하자'는 '제철보국(製鐵報國)'과 함께 포스코의 정신의 근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조업개시 6개월 만에 흑자를 달성한 고인은 1기의 성공을 바탕으로 광양에 제2제철소를 건설하고 1992년 2천

100만t 생산체제를 구축,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자(Miracle-Maker)라는 칭송을 받았다.
 

포스코 역사 40년 중 26년을 최고경영자로 재직했던 고인은 1987년 현역 철강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철강의 노벨

상인 베세머 금상을, 1992년에는 세계적 철강상인 윌리코프상을 수상했다.
 

정치인으로서의 고인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고인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계기는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그 뒤 포항제철 회장을 겸임하면서 11, 13, 14대 등 3선 경력을 쌓았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민정

당 대표로 박탈되면서 정치의 전면에 서게 됐다.

 

그러나 민정당 대표 취임 후 '3당 합당'이 이뤄지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악연이 시작되면서 정치인 박태준은

곧 시련을 맞게 된다.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씨와 맞서다 좌절한 고인은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그해 3월 포철의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수뢰 및 뇌물수수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97년 포항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4년여의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포항북구 보선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한 고인은 그해 9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의 '도쿄(東京)

회동'을 계기로 이른바 'DJP연합'에 합류한 뒤 야당후보 단일화 협상이 타결되자 같은 해 11월 21일 자민련 총재

직에 취임했다.
 

이런 영욕을 거듭한 끝에 2000년에는 국무총리직을 맡았지만, 그해 5월 부동산투기 및 명의신탁 문제가 불거지면

서 4개월의 단명 총리로 불명예 퇴진했다.
 

2001년에는 뉴욕 코넬대학병원에서 폐 밑 물혹 제거수술을 받았고 포철 명예회장으로 다시 위촉됐다.
 

2008년에는 포스코가 그의 호를 따 설립한 사회공헌재단인 포스코청암재단의 이사장에 추대됐다.
 

지난 9월에는 포항 포스코 한마당체육관에서 포스코에 청춘을 바친 퇴직 직원 370명과 19년 만에 재회하는 행사

를 갖는 등 최근까지도 대외활동을 계속했지만 이후건강이 악화하면서 외부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 2일 포항 포스텍 본부에서 열린 고인의 동상 제막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가졌던 고인은 1960년대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명예회장으로 재직할 때

까지 포스코의 주식을 단 한 주도 보유하지 않았다. 포철 명예회장직도 월급 없는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2000년에는 40년간 거주하던 아현동 소재 주택을 처분해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 집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당시 의장이었던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특별

하사금을 받아 매입한 집이었다.

철강신화 일군 '철의 사나이' 박태준

중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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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주식도…남긴 재산 전혀 없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타계

'포스코 1세대 어렵게 살아 안타까워'
재계 '근대화 큰별 졌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개인 명의로 남긴 재산이 전혀 없다고 유족 측이 밝혔다.

유족 측 대변인을 맡은 김명전 삼정KPMG 부회장은 13일 서울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 앞에서 브리핑을 통해 “박 회장 본인 명의의 재산이나 유산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재산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며 “본인 명의의 집도 없고 주식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철소 창업 당시부터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며 “큰딸의 집에서 살면서 생활비도 자제들의 도움으로 마련했다”고 전했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오른쪽)과 이희범 경총 회장이 빈소로 들어가고 있다.

 

 

포스코 임직원들에게 남긴 유언도 공개됐다. 김 부회장에 따르면 고인은 “포스코가 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만족한다.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강이 되길 기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항상 애국심을 갖고 일할 것”을 당부하고 “포스코 창업 1세대들 중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가족들에게는 “고생시켜 미안하다. 화목하게 잘 살아라”라는 뜻을 전했다.

박 명예회장 타계 소식에 포스코 임직원들은 비통해했다. 이구택, 황경로, 정명식 전 포스코 회장, 윤석만 포스코건설 상임고문 등 원로 10여명은 이날 오후 박 명예회장 별세 소식을 듣자마자 빈소인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왔다. 태국 출장 중인 정준양 포스코 회장은 14일 새벽 급거 귀국하기로 했다.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 사내 게시판에는 각종 행사와 회식을 가능한 한 자제하라는 회사 측의 지침이 올라왔다. 포스코의 한 임원은 “오늘의 포스코를 있게 한 박 명예회장의 부고를 접하고 아버지를 잃은 듯 가슴이 아팠다”며 “고인을 가슴에 묻겠다”고 말했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등 주요 기업들은 “국내 산업 근대화의 기틀을 다진 큰 어른을 잃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삼성은 공식 애도 메시지를 내고 “고인은 삼성 창업주이신 고 이병철 회장,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등

 

 

 
 

과 함께 우리나라의 개발연대를 이끌어오신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현대차도 “고인이 일군 철강산업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끈 엔진이었다”고 애도했다. LG는 “깊은 애도를 표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추도사를 냈다. SK는 “우리나라가 무역 1조달러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고인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이라며 고인을 기렸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은 “고인의 열정과 가르침을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따르도록 하겠다”고 했다.

@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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