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윤무영 대한민국에 10억원이 넘는 금융 자산을 가진 사람은 8만7천명가량 된다.

안과 전문의 정 아무개씨(52)는 고액 자산 보유자이다.정씨가 보유한 총자산은 50억원가량. 서울 서초동과 여의도동에 있는 36~66평 아파트 세 채와 골프 회원권 두 장을 갖고 있다.

주식·채권·펀드·예금을 합친 금융 자산은 15억원 정도. 정씨는 10월 초 여의도 36평형 아파트를 매물로 내놓았다.종합부동산세나 재산세가 늘어난 것이 부담스러워 팔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그는 “아파트만큼 수익성과 안정성을 두루 갖춘 투자 상품이 없다”라고 말했다.정씨는 투자 기대 수익이 높은 해외 부동산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정씨는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액 자산 보유자이다.자산 규모뿐만 아니라 투자 포트폴리오나 전망도 평균에 가깝다.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는 <아시아·태평양 연례 부자 보고서>를 통해 정씨와 같은 한국의 고액 순자산 보유자가 지난해 8만6천7백 명이라고 발표했다(표 참조). 메릴린치가 규정한 고액 순자산 보유자는 금융 자산으로만 1백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부자’다.

그렇다면 한국의 백만장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자산을 어떻게 운용하고 있을까. 메릴린치 보고서와 시중 은행 프라이빗뱅킹(PB) 담당자 인터뷰를 통해 굼금증을 풀어 보았다.먼저 메릴린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고액 순자산 보유자는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비교해 안정성 높은 금융 상품을 압도적으로 선호한다.

한국 고액 순자산 보유자가 보유한 전체 자산 가운데 현금·예금 비중은 35%이고 채권이 25%나 되었다.가장 보수적인 투자 행태를 보이는 일본도 현금·예금 보유 비율은 27%이고 채권 비중은 16%에 불과했다.주식 투자 비율은 24%로 한국(20%)보다 크게 높지 않았으나 헤지펀드나 선물·옵션 투자로 분류되는 대체 투자는 23%나 되어 한국(5%)을 크게 앞섰다.타이완의 대체 투자는 32%나 되었다(표 참조).

예금이나 채권 못지않게 안정성이 높은 투자 대상이 부동산이다.국내 고액 자산 보유자가 부동산 투자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김상윤 하나은행 웰스매니지먼트 지원팀장은 “국내 고액 자산 보유자는 일반적으로 총자산의 4분의 3은 부동산으로, 나머지 4분의 1은 금융 자산으로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산술적으로 계산하면, 금융 자산 1백만 달러(약 10억원)를 가진 8만6천7백명은 40억원이 넘는 총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부자들, 금융 자산 비율 70% 넘어

한국의 고액 자산가가 부동산을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재산 형성 과정과도 연관이 깊다.집과 땅에 투자해 자산을 크게 불린 이가 자영업이나 유가증권 투자로 부를 이룬 이보다 유난히 많다.강남 지역을 비롯한 아파트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얻은 시세차익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김상윤 팀장은 “자산 규모가 50억원 안팎인 이들은 아직까지 아파트 두세 채는 기본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AP 연합 고액 자산 보유자들 사이에 중국 부동산(위)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번 성공하면 같은 길을 답습하려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다.정부·여당이 집값 상승을 막겠다는 의지를 거듭 천명하고 있으나 아파트 두세 채를 보유한 고액 자산 보유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한 시중 은행의 PB(고액 고객) 담당자는 “최근에는 수익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되는 부동산 투자 대상을 찾기 위해 중국에 다녀왔다”라고 말했다.

국내 고액 자산가들은 이제 해외 부동산으로까지 관심 폭을 넓히고 있다.몇 해 전부터 미국·일본·중국 부동산 투자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정부·여당이 부동산 경기 안정책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국내 부동산 경기가 빠르게 냉각되었기 때문이다.이 와중에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문영소 국민은행 분당지역 PB센터장은 “국내 부동산 경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데다 한반도 정세가 불안해지자 해외 부동산에 대한 문의가 크게 늘어났다”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해외 부동산 구입자 중에는 실수요자가 많다.유학 떠난 자녀가 살 집을 마련하거나 이민을 앞두고 집을 미리 사두는 이가 다수다.하지만 최근 들어 적극적인 투자에 관한 문의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김팀장은 “부동산에 대한 미련이 해외 부동산 투자로까지 이어지는 감이 없지 않다”라고 말했다.
해외 투자에 대한 관심은 부동산에 그치지 않고 주식 시장까지 확대되고 있다.국내 주식 시장이 약보합세를 보이자 일본과 인도를 비롯해 성장세가 뚜렷한 주식 시장에 대한 직접 투자나 지수펀드 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투자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부동산 보유 비중은 줄이고 펀드나 주식 같은 금융 자산 보유 비중을 늘리라고 충고한다.문영소 센터장은 “미국 고액 자산가는 총자산 가운데 금융자산 보유 비중이 70%가 넘고 부동산은 30%에 불과하다.앞으로 국내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부동산 선호도는 떨어지고 금융자산 비중이 늘어날 것이므로 갖가지 펀드 상품을 중심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김상윤 팀장은 “분산 투자가 중요하다.부동산에 지나치게 편중된 자산 포트폴리오를 주가지수 연동형 상품이나 일본·인도 같은 수익성 전망이 좋은 주식 시장 인덱스 상품에 분산 투자할 필요가 있다.금융 자산을 늘려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투자 컨설턴트의 이러한 충고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투자 관행을 바꾸는 힘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다.부동산 시장의 하향 안정화 추세가 정착되고 부동산보다 수익률이 높은 상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국내 고액 자산 보유자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큰 변화를 찾기 힘들 듯하다.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