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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0)] 화성안 행궁동 한옥은 왜 사라졌을까? - 김충영 논 |♣김충영의현미경

2023-09-18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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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0)] 화성안 행궁동 한옥은 왜 사라졌을까?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9.18 04:00

1907년 수원 행궁동의 모습. 독일인 헤르만산더가 동남각루에서 장안문 방향으로 찍은 사진. 앞에 보이는 부분은 수원사가 있는 곳이고, 멀리 장안문과 화홍문이 보인다. 사진에는 초가집만 보인다. (사진=수원시)

수원에 본격적으로 한옥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현륭원을 조성하기 위해서 구 읍치를 팔달산 자락으로 옮기면서부터이다. 구읍을 옮기는 일은 1789년 7월 15일 부터 토지 및 가옥의 보상이 실시됐다. 보상금을 수령한 집에서는 구읍의 가옥을 해체하여 자력으로 이축(移築)했다.

구읍의 초기보상 계획은 244호를 대상으로 추진했으나 최종적으로는 75호가 늘어난 319호로 확정되어 보상이 진행됐다. 구읍 이주(신읍건설)가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1790년 7월 15일 정조는 신읍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방안으로 양곡을 나누어주라고 지시한다.

수원부사 조심태는 신읍에 거주하는 주민이 719호가 살고 있음을 보고한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원부 주민이 469호, 원주민 63호, 주인을 따라온 노비 또는 소작인 46호, 타지방에서 이사온 백성 141호에게 쌀을 나누어준 결과를 보고 한다. 신읍이 건설된 지 1년 만에 719호의 집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조대왕은 1790년 2월 수원 행차 때 신읍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이번 행차에 수원부를 두루 살펴보니 신읍과 관청은 비록 규모를 이루었으나 민가는 아직 두서가 없고 움집도 아니고 보루도 아니고 마치 달팽이 껍질 같고 게딱지와 같다. 대도회를 이루는 것은 날짜를 기약할 수 없는 일로 구읍보다 좋게 하는 일은 조정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으니 개선계획을 마련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이렇듯 허겁지겁 짓다보니 신읍 초기 모습은 번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5년이 지난 1794년 화성성역이 시작돼 34개월만인 1796년 9월 10일 성역이 완료됐다. 정조는 화성성역에 참여한 성역소의 관리와 장인들의 노고를 치하며, 5~6호 밖에 안 되던 곳이 이제 1000호가 되는 대도회로 발전했음을 치하한다.

1797년(정조21) 신읍의 안정된 발전을 위해 부유한 자 20인을 신읍에 이주시키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들에게 목재 구입을 돕는 방편으로 지급한 융자금을 매년 1000냥씩 반분하여 납부케 하는 등 시전의 활성화를 통한 기와집 짓기를 추진했다.

1933년 수원 행궁동 모습. 수원천과 장안문~팔달문간 도로, 사이에 팔부자거리가 보인다. 멀리 팔달산과 앞쪽에 화성행궁터에 수원의료원, 수원경찰서, 신풍초등학교 등이 보인다. 행궁동에는 낮은 한옥이 대부분이다. (사진=수원시)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수동에 팔부자거리가 있음을 볼 때 최종 8호가 유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수동의 옛 이름이 은혜를 널리 베푼 동이라 하여 보시동(普施洞)이라 했다.

신읍의 초기 모습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있었음에도 활성화는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조가 1800년에 돌아간 이후 국력이 급격하게 쇠락하여 1910년 나라를 잃게 됨에 따라 일제는 조선 침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토지조사 사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작성된 지적도에 가옥이 있는 대지가 1200호로 집계됐다.

1911년 화성안 행궁동 지적도. 빨간색은 당시까지 남아있던 관청 건물. 노란색은 가옥이 있던 대지, 보라색은 학교, 짙은녹색은 임야, 녹색은 농지이다. (자료=수원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화성축성이 완료된 1796년에 1000호에서 1911년까지 115년 동안 118호가 증가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성안 마을에는 한옥이 주류를 이뤘다.

화성행궁과 관아, 성곽시설의 수난은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된다. 1910년 조선총독부 법률 제1호로 ‘조선읍성 훼철령’을 제정하여 전국의 읍성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화성행궁과 성곽시설물이 차례차례 허물어졌다. 한옥이 본격적으로 훼손되는 시기는 1910년대 중반부터다. 장안문에서 팔달문간의 기존도로를 확장했고, 동서간의 도로는 새로이 도로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가옥(한옥)이 철거됐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구시가지 상점 현황. (자료=수원시)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해오면서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정책을 마련해서 시행했다. 1942년에 작성된 수원상공인 인명록에는 1929년부터 1935년 사이의 수원읍 상점 93개 업종 총 866개 업체가 등록됐다. 한국인이 74개 업종에 696개소, 일본인이 67개 업종에 121개소, 중국인이 2개 업종에 11개소를 운영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은 일본식 건물로 바뀌게 됐다.

1923년에는 천주교 수원본당이 북수동 팔부자거리에 자리 잡았다. 현재 북수원성당과 옛 소화초등학교가 팔부자거리 한옥 자리에 자리 잡으면서 한옥이 철거됐다. 또한 일제강점기 도심정비사업으로 계획한 팔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1954년 시행됨에 따라 팔달동, 남수동, 영동 일원의 약 3만평 지역에 있는 한옥이 헐리게 됐다.

수원은 1967년 경기도청의 유치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수원은 구시가지가 유일했다. 구시가지는 구읍 이주민들이 자력으로 지은 곳이라서 청소차와 소방차 한 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1947년 수원 행궁동 일원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수원시는 주민들의 생활불편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시계획으로 소방도로를 계획하게 된다. 이 계획은 시간이 지나면서 도로가 뚫리게 됐는데 한옥을 철거해야 도로가 만들어졌다. 도로가 없던 곳에 도로가 만들어지자 토지주들은 수익이 많은 2,3층의 양옥 건물을 지었다. 결국 소방도로 사업은 화성 내 한옥을 없애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이후 산업화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수원은 경기도 남부지방의 중심 상권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성안의 한옥은 더 이상 보존가치가 없는 건물이 되고 말았다. 하나둘씩 양옥 건물로 바뀌고 말았다.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면서 시행한 행궁광장 조성사업, 화성박물관, 전통문화센터, 수원시립미술관 등 사업을 추진하면서 많은 한옥이 없어졌다.

2022년 9월 수원 행궁동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위에서 언급한 것같이 화성 내에는 조선말까지 약 1200개의 한옥이 있었다. 그 많던 한옥은 혼란기를 겪으면서 하나둘씩 사라졌다. 9월 7일자 수원일보는 "2009년에 66채의 한옥이 남아 있었으나 2023년에는 43채로 감소했고, 그나마 양호한 건물은 13채에 불과하다"며 "화성 내 남아있는 한옥만이라도 온전한 보존이 시급하다"고 보도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신을 거울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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