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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99)] 수원은 ‘효원의 도시’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 |♣김충영의현미경

2022-12-05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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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99)] 수원은 ‘효원의 도시’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입력 2022.12.05 05:20

가칭 화산대효원종합계획 보고서. 제1무임소장관이던 이병희 국회의원이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계획서이다. (자료=수원시)

수원이 ‘효원의 도시’라는 별칭을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효원(孝園)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단어이다. 이는 효(孝)와 전원(田園)을 합성한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수원에서 ‘효원’이라고 표기한 기록은 1973년 ‘수원성곽복원정화계획’이다. 부제를 ‘화산대효원종합계획’ 이라고 적었다. 당시 ‘제1무임소장관 이병희 국회위원’이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결재를 얻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에서 최초로 등장하고 있다. 이 계획서를 작성한 당시 ‘제1무임소장관실 임수복 사무관(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수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다 보니 가장 적합한 단어가 ‘효원’이었다고 했다.

이후 ‘효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974년 11월 12일 제13대 수원시장으로 부임한 이재덕 시장이다. 수원화성 복원사업이 1975~1979년 까지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이 시장은 ‘1975년 시정기본목표’를 ‘효원(孝園)의 새수원’이라고 내걸었다. 시정방침은 성실한 봉사, 엄정한 책임, 착실한 결실을 내걸었고, 실시방향은 유신이념의 생활화, 새마을 운동의 가열화, 영세시민 생활의 안정화, 대효원 건설, 도시기반 조성, 등을 내걸었다.

이후 1978년 8월~1980년 5월까지 근무한 제14대 백세현 수원시장 역시 ‘효원의 새 수원’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고 한동민 수원박물관 학예팀장(현 화성박물관장)은 ‘1970~80년대 수원의 변화 “효원의 도시 수원”에서 “활기찬 수원건설” 까지’에서 밝히고 있다.

고려 효자 한림원 학사 최루백 효자비. 화성시 정남면 수기리에 있다. (사진=화성시)

수원이 효원의 도시로 불리게 된 연원을 살펴보면, 수원은 예로부터 효자 · 효부 · 열녀가 많은 고장이었다. 고려시대 최루백(崔婁伯)은 수원 최씨 시조 최상저의 아들로 고려 시대 문신이었다. 조선 세종 14년에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최루백의 행적이 수록돼 있을 정도로 지극한 효자였다.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죽자 그 호랑이를 죽이고 뼈와 살을 거두어 안장한 후,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최루백의 효자비각은 조선 숙종 때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비각을 건립했다.

이고 선생 신도비.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광교 진입로 오른편에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이고(李臯) 선생은 고려말 문신으로 한림학사를 지냈다. 정국이 혼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수원으로 낙향하여 탑산(塔山)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그를 조정에 등용코자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조는 그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려 올리게 했는데 사통팔달해 거칠 것이 없는 아름다운 산이라며 탑산을 팔달산으로 사명(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는 팔달산 자락에 살다가 적사리(赤寺里)로 이사해서 학당을 열어 "착하게 살아라" 즉,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항상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였다. 그는 정성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여막을 지키고 살았다고 한다. 이때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며 효성으로 애통하는 마음이 지극해 피눈물이 그치지 아니하니 마침내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됐다고 한다. 세종 때 마을 입구에 ‘고려효자 한림학사 이고의 비’를 세웠다. 정조는 그가 살던 집터를 효자가 살던 집터라 하여 학사대(學士臺)를 세웠고, 고종은 그가 살던 마을을 권선리(勸善里) 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수원은 정조의 효심으로 현륭원이 조성되고 화성이 건설됐다. 조선시대 왕실의 무덤을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했다. 능은 제왕과 왕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 묘는 왕족이나 일반인의 무덤을 묘라 했다.

99-4, 능원침내금양전도. 1821년에 작성된 건릉지에 삽입된 그림이다. (자료=수원시)

정조는 1752년(영조28)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38)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로부터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보고 11세의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 때 정조는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살려 달라며 할아버지에게 두 손을 빌며 애원했으나 영조는 정조를 쫓아냈다. 영조는 교서를 내려 정조를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시키면서 정조는 더 이상 상복을 입을 수 없었다. 그때 정조의 모습을 두고 ‘슬퍼 우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았다’고 기록했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취임 일성으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를 천명했다. 정조는 비통하게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흉지로 알려지자 1789년 7월 11일(정조13) 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조선 최고의 명당자리인 수원부 읍치 화산으로 이장을 결정했다. 구읍에 있던 319호를 보상을 주어 북쪽의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건설해 이주시켰다.

현륭원의 조성은 1789년 7월 12일부터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7일 천원(遷園, 묘를 옮기다)했다. 그해 가을부터 심기 시작한 나무는 1796년이 돼서야 일단락됐다. 7년간 심은 나무의 숫자와 종류 등의 정리가 필요 했다. 정조는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은 문서를 간략하게 한권으로 정리하도록 명했다.

7년간 식재 상황을 기록한 문서는 만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무 심은 날짜, 나무 심은 사람, 지원하여 나무를 심은 사람, 감독한 사람, 나무를 심은 장소, 나무의 종류, 심은 나무의 수, 나무를 캐온 곳, 나무를 캔 사람, 나무를 운반한 사람, 나무 가격, 지불한 품삯, 포상내역, 포상에 빠진 사람 내역까지 기록했다.

정조는 이들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한 권의 책을 보고자 했다. 이 일을 다산 정약용에게 맡기니 가로 · 세로로 나누어 표 1장으로 만들어 정조께 보고하자 "한권이 아니고서는 상세하게 기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은 장부와 문서를 너는 종이 한 장으로 정리했구나. 참으로 훌륭하다"고 칭찬했다고 ‘다산시문집’에 기록했다. 7년간 현륭원에 심은 나무는 대략 1200만 그루였다. 이는 현륭원 주변의 많은 산에 심어 화산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 내용은 2022년 수원문화원에서 발간한 역사 속의 수원나무, 김은경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현륭원과 신읍조성을 마치고 1794년 정월에 성 쌓기를 시작해 1796년 9월 10일 성역을 모두 마쳤다. 화성성역에 관한 기록은 화성성역의궤 재용(財用) 식목편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성안 매향동, 팔달산, 모든 성벽 안팎, 대천의 양쪽 가장자리와 성밖의 용연, 관길야, 영화정 이북에 매년 봄, 가을에 7차에 걸친 식목과 파종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왕실에서 내려준 단풍 씨앗 만년지 1봉, 비변사에서 온 솔씨 2석, 탱자 1석, 상심 2석 5두, 밤 2석, 상수리 42석 13두 이상의 값 89냥 8전, 오얏나무 7,350주, 복숭아, 살구 등 각색과목 582주 이상의 값 394냥, 연밥 따는 품삯 8냥3전5푼, 화초와 버드나무를 포함해 소나무 캐는데 든 품삯 217냥, 파종 품삯 1080냥, 양미 30석 9두 3승, 값 137냥 7전 9푼, 마소 운임 35냥, 합계 1,961냥 9전 4푼이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뎡리의궤 화성전도. 꽃이 만발한 효원의 도시 모습이다. (자료=수원시)

수원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정신으로 현륭원과 신도시 화성이 건설됐다. 이후 7년간에 걸쳐 수목과 꽃이 울창한 전원도시(효원의 도시)를 만들었다. 오늘날의 수원은 정조시대 축조된 만석거와 축만제 성벽을 쌓기 위해 돌을 뜬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이 공원으로 조성됐다. 면면히 이어지는 ‘효원의 도시 수원’을 더욱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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