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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80)] 50년 전 수원 이야기(2)- 김충영 논설위원 / 도 |♣김충영의현미경

2022-07-1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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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80)] 50년 전 수원 이야기(2)-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논설위원

승인 2022.07.18 06:00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화성안에서 전통의 모습이 사라진 이야기

1907년 화성안의 모습. 독일인 헤르만산더가 한국여행중 동남각루에서 장안문 방향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멀리 장안문과 화홍문이 보인다. 사진에는 초가집만 보인다. (사진=화성박물관)

오늘날의 수원은 1789년 7월 11일 어전회의에서 사도세자의 묘 이장과 구읍의 이주사업이 결정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해 7월 15일 구읍의 이주가 시작돼 10월 7일 사도세자의 묘가 이장됐다. 신읍인 오늘날의 수원은 구읍의 이주로 시작됐으나 도시의 모습을 갖추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정조는 1790년 2월 신읍으로 이주가 완료된 후 현륭원을 참배했다. “이번 행차에 수원부를 두루 살펴보니 신읍과 관청은 비록 규모를 이루었으나 민가는 아직 두서가 없고 움집도 아니고 보루도 아니고 마치 달팽이 껍질 같고 게딱지와 같다. 대도회를 이루는 것은 날짜를 기약할 수 없는 일로 구읍보다 좋게 하는 일은 조정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으니 개선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한다.

신읍 건설 1년이 되자 정조는 신읍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위로해주고자 했다. 신읍의 백성을 위로하는 방안으로 양곡을 나누어주라고 지시한다. 수원부사 조심태는 신읍에 거주하는 수원부 주민 469호, 원주민 63호, 주인을 따라온 노비 또는 소작인 46호, 타지방에서 이사 온 백성 141호 등 전체 719호에게 쌀을 나누어준 결과를 보고 한다. 신읍 건설 1년이 되는 날 719호가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794년 화성성역이 시작돼 1796년 9월 10일 성역이 완료되자 정조는 화성성역에 참여한 성역소의 관리와 장인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정조는 5~6호 밖에 안 되던 곳이 이제 1000호의 대도회로 발전했음을 치하한다.

1980년대 화성행궁터 주변 모습이다. 수원의료원, 경찰서, 신풍초등학교, 경기도여성회관이 보인다. (사진=수원시)

이후 국력의 쇠락으로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조선읍성 철거 시행령’을 발령해 전국의 읍성 300여 곳을 철거했다. 화성행궁도 이때부터 철거가 시작됐다. 행궁자리에 자혜의원이 신축되면서 봉수당과 장락당을 비롯한 행궁 내 여러 전각들이 헐렸다.

객사는 그전에 이미 신풍국민학교가 사용하면서 철거됐다. 북군영은 경찰서가 들어서면서 사라져 행궁에는 낙남헌과 노래당건물만 남게 됐다. 1905년 경부철도가 개통되면서 수원역이 건설됐다. 수원역까지 도로가 연결되면서 시가지가 수원역까지 연결되는 계기가 됐다.

1977년 수원시 기본도, 이 때까지 화성안에는 1920년대 건설한 화서문길과 창룡문길이 간선도로로 표기돼 있다. 하단부에 팔달지구 토지구획정리 사업 시행으로 조성된 격자형 도로가 보인다. 신풍 장안동에 2개의 도시계획도로가 보인다. (자료=국토지리정보원)

일제는 장안문~팔달문을 통과하는 삼남지방길인 제주대로를 차량 소통을 원활히 한다는 미명으로 성곽도 파괴했다. 성내 또한 차량소통을 목적으로 화서문길과 창룡문길을 새로이 개설했다. 이는 도시의 형태를 망가트리는 계기가 됐다.

수원은 1944년 최초로 도시계획을 수립했는데 이때 성안의 남수동과 팔달로에 팔달토지구획정리지구를 지정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시행되지 못했다. 이어 한국전쟁으로 다시 지연되다가 1954년 8월13일 팔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돼 1965년 4월 19일 사업이 완료됐다.

화성 내 9만6987㎡(2만9338평)가 새롭게 시가지가 정비돼 각종 행정시설과 금융, 업무 시설들이 들어섰으나 이는 1789년에 조성된 신읍의 도시 형태를 망가트린 것으로, 지구 내 전통건물이 모두 사라지게 됐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도 화성관련 시설과 도시를 파괴하고 말았다. 전쟁의 상처로 1953년 휴전 이후 1970년대까지 처참한 모습이었으나 차츰 도시의 모습은 안정됐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돼 수원은 급격히 인구가 증가했다. 1970년 당시 성안에는 팔창동 4238명, 영천동 4399명, 남향동 9343명, 신안동 1만1224명이 거주해 성안 4개 동에는 2만9204명이 거주했다.

이는 2020년 행궁동에 1만2136명이 거주해 오늘날의 인구에 비해 1만7068명이나 많은 인구가 화성 내에서 살았던 것이다. 1970년대 화성 내 집들은 대부분 한옥이었으나 부족한 주거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유휴공간에 무허가로 건물을 달아내어 셋방을 짓자 전통의 모습을 크게 훼손하게 됐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당시 박정희 정부는 문화재보호 및 복원·보수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때 국난극복 유적 복원정화사업이 전개됐는데 당시 수원출신 이병희 국회의원 겸 제1무임소 장관은 중앙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문화재복원사업에 수원성곽복원사업을 포함시킴으로써 1975~1979까지 5개년에 걸친 화성복원 사업이 전개돼 오늘날 모습을 되찾게 됐다.

1947년 화성주변 항공사진. 이 때까지 성안의 장안문~팔달문을 연결하는 1번 국도와 화서문길, 창룡문길이 보인다. 이 당시까지는 조선시대 원형의 도시 모습이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1987년 5월 화성주변 항공사진. 이미 화성 내에는 1975년 계획한 도시계획도로가 모두 개설된 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이 때 수원시는 성안의 도시문제인 도로의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1975년 2월 23일 소로망(일명 소방도로) 계획을 확정했다. 이때 결정된 도시계획도로는 1990년대 중반까지 모두 뚫리게 됐다. 이는 도로가 접하지 않았던 필지에 도시계획도로를 건설함에 따라 기존의 한옥이 철거되는 것은 물론이고 도로개설로 토지이용도가 높아지자 2~3층의 양옥건물을 짓게 됨에 따라 화성 내 전통의 모습을 파괴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시작된 자혜의원은 경기도립 수원병원을 거쳐 1988년에는 지방공사 경기도 수원의료원으로 전환됐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89 수원의료원 신축계획이 발표됐다. 당시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은 신풍초등학교 출신으로 화성행궁터에 있던 수원의료원을 신축할 경우 화성행궁의 복원이 영원히 어렵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심재덕 문화원장의 수원의료원 신축반대 의견을 경기도가 받아들임으로써 1992년 수원의료원을 장안구 정자2동에 신축 이전하게 됐다. 심재덕 문화원장은 민선 초대 수원시장이 돼 화성행궁복원을 추진했다.

이어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 1997년 12월 6일 드디어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됨에 따라 심재덕 시장은 화성주변에 대한 정비와 복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수원시 여러 부서에 분산됐던 화성복원·정비 업무를 2003년 화성사업소를 설립해 일원화했다.

수원시 화성사업소는 20여 년간 행궁광장조성, 화성박물관 건립, 장안문화지구 조성, 신풍지구조성과 화성주변 정비사업 등 수많은 사업을 전개했다. 이들 사업은 훼손된 화성을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2020년 화성주변 항공사진. 화성 주변 현재의 모습이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그런데 광장을 조성하고 박물관 건립과 팔달구청 건립, 장안지구와 신풍지구의 문화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토지와 건축물들을 편입, 철거해야 했다. 결국 화성 안에 이러한 시설이 들어옴으로써 화성의 원래 모습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앞으로 화성주변에서 행해지는 사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전통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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