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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79)] 50년 전 수원 이야기(1)- 김충영 논설위원 / 도 |김충영의현미경

2022-07-11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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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79)] 50년 전 수원 이야기(1)-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논설위원

승인 2022.07.11 05:20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한국전쟁이후인1950년대 중반의 수원시가지의 황폐한 모습이다. 아래 왼쪽은 팔달산, 중간이 화성과 시가지이다. 뒷쪽이 광교산, 산에 나무 한포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1970년대까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사진=수원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수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속담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50년이라는 세월은 강산이 다섯 번 변하는 반백년의 세월이다. 대한민국은 반만년 역사 이래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가 오늘날 50년의 세월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와 수원과의 인연은 1971년 수원공업고등학교에 제1기로 입학하면서였다. 고향인 화성군 우정면 원안리를 떠나 수원에 와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한지 22년이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난 지 18년이 되던 시기였다.

전쟁의 상처는 아물었으나 도시의 모습은 요즘 TV에서 세계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동남아시아나 중남미 오지의 못사는 마을 그대로 모습이었다. 4차선도로는 성내를 통과하는 1번 국도가 유일했다. 교통사정은 주변지역과 연결되는 시외버스가 고작이었다. 수원은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어서 서울과 부산, 목포 등지로의 연결은 편리했다.

그리고 일제가 여주, 이천 지역의 양곡을 수탈하기 위해 부설한 수인~수여선은 지역 특산물 운송과 학생들 통학에 이용됐다. 필자는 고3 때인 1973년 10월 농촌진흥청에 실습을 나간 일이 있었는데 당시 수원에서 유일하게 운행되는 1번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원호원~남문~수원역~농대~진흥청을 운행하던 1번 버스 시대는 1970년대 중반까지 유지됐다.

1960년대 수원천 천변 모습. (사진=수원시)

당시 수원천에는 한국전쟁 당시 하천변에 말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지어서 생활하거나 가게를 운영하던 집들이 많았다. 이런 집들을 1970년대 초부터 정비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아무튼 수원은 도청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현대화되지 않은 읍의 모습이었다.

내가 살았던 인계동은 수여선의 화성역이 위치한 인근 절벽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다. 매교다리 건너편에서 4~5미터 폭으로 화성역 쪽으로 연결된 도로인데 매교 다리에서 300m쯤 가다가 오른편에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생긴 마을이었다. 20여 호가 화장실과 수도를 공동으로 사용했다.

1974년 인계동 항공사진, 왼쪽으로 수원천, 가운데 길게 보이는 곳이 수여선 폐선 철도부지, 오른쪽 상단에 수원공고가 보인다, 현재는 재개발사업이 진행중이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이 시절 수도사정이 좋지 않아 수돗물을 시간제로 급수했는데 수돗물이 나오는 시간이면 들통이며 큰 함지박을 줄 세워놓고 차례를 기다렸다. 아침이면 화장실을 가는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야 했는데 용무가 급한 사람은 앞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먼저 용변을 보아야 했다.

 

대문을 나서면 리어카도 통행이 어려운 좁은 골목길이 이어졌다. 이 길로 50여m쯤 가면 조금 넓은 골목길을 만난다. 이 길 또한 자동차가 간신히 들어을 정도였다. 당시는 연탄(19공탄)을 사용했다. 초겨울 300~400장의 연탄을 들여 놓으려면 온 집안 식구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릴레이로 연탄을 운반했다. 이곳이 현재는 재개발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집에서 동쪽으로 200여 미터 지나면 화성역이 나온다. 수여선에는 두 종류의 기차가 다녔다. 하나는 여객열차이고 또 하나는 화물을 나르는 증기기관차이다. 당시 사람들은 여객 열차를 동차라 했다. 수여선, 수인선은 철로 폭이 좁은 협궤인데 물동량이 많지 않고 기차가 힘이 부족해서인지 2량짜리 기차가 운행됐다.

1971년 수원공고에 들어온 학생들은 화성과 용인지역 출신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수여선을 타고 다녔다. 화성역에서 200여 미터쯤 동쪽으로 수원공고 뒤에 언덕이 나오는데 동차는 힘이 모자라서 천천히 언덕을 지나게 된다. 이 때 학생들은 차비를 아끼려고 몰래 뛰어가서 무임승차를 하기도 했다.

1972년 폐선되기 전 수여선 철길. 동수원사거리 방향에서 찍었다. 사진 왼쪽이 수원공고 뒤 경사면이다. (사진=수원시)

수여선 기차를 타 본 것은 고1 수학여행을 여주로 갔는데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보았다. 1930년 12월 1일 개통한 수여선은 1971년 12월 영동고속도로가 여주까지 개통되자 주변의 교통이 도로교통으로 흡수됨에 따라 수여선은 1972년 4월 1일 폐선됐다. 수인선은 1995년 폐선 됨에 따라 수인~수여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집에서 남문으로 나가려면 좁은 골목을 지나고 또 지나야 했다. 수여선 간이 건널목을 지나면 수원천에 다다른다. 전기한 것처럼 수원천에는 양옆으로 무허가 가건물 상가들이 지금의 매교 부근부터 전기회사다리(지금의 수원교)를 지나 지동교를 거쳐 화홍문 아래 지금의 매향1교까지 이어져 있었다.

가건물은 하천변 제방을 3~4미터를 점유하고 3~4m미터는 하천에 나무로 기둥을 세워 건물을 지어서 가게 또는 살림집으로 사용하였다. 당시에는 하수도 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생활폐수를 하천에 버리는 바람에 하천 물은 악취가 아주 심하게 났다.

수원천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화홍문이 나온다. 당시 수원사람들은 화홍문을 다른 말로 '칠간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상류지역엔 수원우시장도 있었다. 수원우시장은 전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우시장으로 인해서 수원천변 영화동 일원은 소와 관련된 점포들이 많았다. 주막집이며 마방 등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우시장 관련 기사도 생각난다. 당시 소 값을 많이 받기 위해서 소에게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소가 살찐 것 같이 보이기 위해서 소에게 물을 많이 먹였는데 고압호스를 소입에 넣고 강제로 물 먹이기, 물 먹이고 소를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살이 부풀어 오르게 해서 몸집불리기 등 많은 방법을 동원했다. 사정기관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관련자들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해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

이어 광교방향으로 올라가면 광교저수지 밑에 광교유원지가 나타난다. 1971년 풀장과 그늘막이 만들어졌다. 측량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제안으로 광교풀장 인근에 가서 측량실습을 하고 풀장에 가는 행사가 진행됐다. 당시 나는 담임선생님 일을 도와드리느라 아쉽게 함께 하지 못했다.

당시 가까운 친구가 북중학교 정문 앞에서 살았는데 아버님이 인근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농토가 영화동과 조원동, 광교 등에 있어서 모내기철에는 몇 차례 일손돕기를 했다. 그런 일로 우리는 광교산에 자주 가곤했는데 당시는 광교산에 제대로 생긴 나무가 한그루도 없었다.

그나마 우리 키보다 큰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 이름은 노간주나무라고 했다. 이 녀석은 향나무처럼 잎이 가시로 돼있어 추스르기가 어려워 그놈만 남아 있었다. 헬기장 쪽으로 가다보면 상수리나무가 길가에 있었는데 땅에 붙어 자라서 종자가 크지 않는 나무라고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평야지대에서 자라서 나무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당시 땔감은 나무가 아니면 볏짚이었던 시대에서 연탄으로 넘어가던 시대였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이후 땔감이 부족하자 광교산은 수원시민들의 땔감 공급처였던 것이다. 나무는 모두 베어 매향교 부근에 형성된 나무시장에 팔았다고 한다. 광교산은 1971년 당시까지 사방사업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은 이미 사방사업이 시행돼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당시는 농약이 없던 시절이라 사방사업으로 식재한 소나무 잎을 송충이가 갉아 먹어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그래서 수원시는 매년 6월경이면 각 기관과 관내 중·고등학생들이 참여하는 송충이 잡기행사를 했다.

당시 팔달산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소나무 크기는 고등학생 키높이 정도 됐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송충이를 잡기 위해서는 오른손으로는 집게를 쥐고 왼손으로는 소나무를 잡아 당겨 송충이를 잡았다. 그러니까 지금 팔달산에 있는 대부분의 소나무는 60년대에 심은 것으로 60살 정도 됐다고 생각하면 될 것같다.

1979년 수원시 인구 및 가구현황 도표. 1971년 수원시 통계연보에 삽입된 그림이다. 1955년 7만2000명에서 1971년 17만518명으로 늘어 년평균 16%의 인구가 증가했다. 당시 남성이 49.5%, 여성 50.5%로 구성됐다. (자료=수원시)

1970년의 통계연보를 살펴보면 당시 수원시의 인구는 17만518명의 작은 도시였다. 50년이 지난 2020년의 수원시 인구는 123만5000명이 돼 7.24배가 늘어났다. 행정구역은 83.67㎢에서 121.09㎢로 확장돼 1.45배가 확장됐다. 행정구역은 45%가 늘어났으나 인구는 725%가 늘어나 도시의 대부분이 시가지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 수원시 농가 및 호수 현황. 1971년 수원시 통계연보에 삽입된 도표. (자료=수원시)

당시 통계연보를 살펴보면 수원시의 주산업이 농업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농사를 짓는 가구수는 3587호로 경지면적은 2865.8정보(1정보=3000평, 859만7400평)이어서 농가당 2397평을 경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20년 현재 수원시의 농지는 개발제한구역 일부 서수원 지역에 일부만 남아 있다.

1970년 수원의 행정동은 화성 내(현 행궁동)에는 팔창동, 영천동, 남향동, 신안동 등 4개의 동사무소가 있었다. 그리고 화성주변으로 지만동, 연무동, 영화동, 고화동, 매산동, 매교동, 인계동, 세류1동, 세류2동 등 9개동이 있었다. 그리고 외곽으로 파정동, 매원동, 곡선동, 평동, 서둔동 등 5개의 농촌동이 있어 모두 18개 동사무소가 있었다.

1개 동의 평균 인구는 9473명이었다. 2020년 수원시에는 장안구에 10개동, 권선구에 12개동, 팔달구에 10개동, 영통구에 12개동이 있고 수원시에는 전체 44개의 동사무소가 있다. 2020년 수원시 1개동의 평균 인구는 2만8068명이어서 50년 전보다 3배의 주민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 수원시 재정규모 및 일반회계 예산액을 나타낸 1971년 수원시 통계연보 도표. 재정규모와 세입 세출액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표기돼 있다. (자료=수원시)

1970년도 일반회계 총예산액은 8억5070만원이었다. 당시 쌀1가마당 5784원이었으므로 쌀값으로 환산하면 14만7078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2020년도 수원시 일반회계 총예산은 2조4842억4900만원이었고, 쌀값은 19만832원으로 1301만7990가마를 살 수 있어서 88.5배가 증가했다. 가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원시 예산 규모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수원은 50년 동안 천지가 개벽한 도시가 됐다. 수원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공이라고 생각한다. 수원은 대광역시를 포함, 전국에서 7대 도시로 성장해 수원특례시가 됐다. 정조대왕이 만든 도시 수원이 살기 좋은 문화도시로서의 명성 유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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