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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58)] 1789년 ‘수원 신읍(新邑)’ 초기모습은 어떠했을까 |♣김충영의현미경

2022-02-1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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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2.14 05:05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해동여지도에 수록된 1760년대 수원부지도. (자료=수원시)

구 수원읍치가 명당으로 알려진 이후 수원읍치는 언젠가 새로운 곳으로 옮겨야 할 운명이었다. 1659년 5월 4일 효종이 서거하자 조정에서는 능자리 선정에 착수했다. 다음은 현종실록 6월 19일자 기록이다.

현종(顯宗)이 이르기를 “수원이 가깝고 또 흉해(凶害)가 없으니 그곳을 쓰기로 결정함이 좋겠다.”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산릉의 일은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별지에 적은 것을 드리면서 아뢰기를 “가옥 500여 채를 옮겨야하고 밭700여결을 묵혀야 합니다.” 하니 현종이 이르기를 “경들이 상의하여 편리하게 환급하여 민원이 없도록 하라.” 하고, 또 묻기를 “읍거(邑居)는 어느 곳으로 옮기려 하는가?” 하니 총호사 좌의정 심지원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수원부의 북쪽 고등촌(高等村)으로 옮겨야 합니다.”하였다.

1947년 팔달산 일원 수원항공사진. (사진=수원시 항공사진 써비스)

이로부터 111년 뒤인 1770년 반계 유형원의 저서 반계수록에 “수원 읍치를 북평으로 옮기고 성을 쌓으면 장래 1만호 가량 되는 큰 도회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좌의정 심지원과 같은 주장이다. 팔달산 아래에 신도시가 조성된 것은 1789년 7월 11일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로부터 비롯됐다.

1789년 7월 12일 수원부사로 부임한 조심태는 3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첫째는 사도세자 묏자리를 조성하는 일, 둘째는 구읍치의 민가와 관아시설을 철거하여 옮기는 일, 셋째는 신읍치를 조성하는 일이었다.

당시 사정을 기록한 ‘정조실록’과 ‘일성록’, ‘수원하지초록’ 등을 살펴보면 현륭원을 조성하는 내용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구읍의 보상과 이주과정 또한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반면 신도시를 조성하는 경위는 일부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 신도시를 조성하는 내용은 상대적으로 부실하다.

 

이러한 현상은 일의 경중에 따른 것이라 생각된다. 사도세자의 묘터를 조성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에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묘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민가와 관아시설들이 조속히 이전되어야 했으므로 민가에 대한 보상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신읍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인지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수원하지초록 1789.8.5.일자 기사. (자료=서울대학교 규장각)

‘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 1789년 8월 5일 기록을 살펴보면 정조는 “팔달산 주인이 바로 진사 이운행(李運行)의 집안이고, 또 여러 대의 분묘가 묻혀있는 비탈면에 신읍향교를 짓기 위해서 그 산지를 모두 빼앗는다면, 이 어찌 이은창(李殷昌)을 영장(營將)에 잉임(仍任)한 본래 뜻이겠느냐. 만일 합당한 곳이 있다면 다시 향교터를 물색하고 그렇지 못하면 전례를 초월해 후한 값을 지급하고 산주인의 재능과 지식이 어느 정도인가 살펴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수원부사 조심태는 “말씀에 따라 지사(地師)와 교임(校任)으로 하여금 향교터를 신읍터 옆의 가까운 여러 곳을 물색토록 했으며, 이운행을 지금 곧 순영(巡營, 경기감영)에 올려 보내겠습니다.” 라고 보고한다.

정조실록 1789.8.7.일자 기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13년 8월 7일 기사를 살펴보면, “이운행(李運行)을 등용하도록 명하였다. 운행은 고(古) 처사 이고(李皐)의 후손으로 집이 팔달산(八達山) 아래에 있었는데, 이때 수원(水原)의 새 읍치(邑治)를 팔달산에다 정하였다. 그리하여 향교를 운행의 선영 곁에 세우게 되었는데, 상(上)이 그 소식을 듣고 그의 3세(三世) 다섯 분묘가 한꺼번에 모두 옮겨지게 된 점을 가엾게 여기어, 경기 감사에 명하여 장례 물품을 넉넉하게 지급토록 하고, 인하여 이운행을 등용하라고 명한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9월 25일자 기록을 살펴보면 정조는 “수원의 이주할 백성으로 소민(小民)은 스스로 댓가를 받아 재목을 모아 힘에 따라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관속은 교(校)·이(吏)·예(隷)·노(奴)를 막론하고, 반드시 모든 역(役)마다 몸을 빼낼 방법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집안 일을 미처 생각하겠는가. 보아하니 지금 서리 내릴 계절이 점점 긴박하여 추위를 재촉하는 뜻이 있으니, 그 거처를 편히 하는 방법을 잠시도 늦출 수 없다. 대책을 소민(小民)과 갖게 하여 추위를 탄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수원부사 조심태는 “이사할 자가 244호인데 집을 지어 옮겨 거주한 자가 90호이고 이직 미처 옮기지 못한 자가 150호나 됩니다. 이는 관속이 몸을 빼낼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무리 중 구읍(舊邑) 근처에 농사를 짓는 자가 거의 그 반이나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 값을 받은 다음 혹 밭머리에 장막을 치고 살면서 수확을 기다리는 자가 있고, 혹 잠시 구거(舊居)에 살면서 가을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자가 있습니다. 비록 중요한 사역이라도 반드시 윤번제로 휴가를 주어 아직 추위가 깊어지기 전에 기필코 거처할 집을 지어, 처소를 잃고 추위에 탄식하는 경우가 깊어지기 전에 기필코 거처할 집을 지어, 처소를 잃고 추위에 탄식하는 경우에 이르지 않게 하겠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수원하지초록 1789.9.26.일자 기사. (자료=서울대 규장각)

그리고 9월 26일 기사를 살펴보면 “수원부 신읍참(新邑站)의 행궁 및 객사, 향교를 우선 완성하고 칸수를 구별하여 열거해 보고합니다. 행궁 27칸, 삼문 5칸, 좌변익랑 9칸, 우변익랑 6칸, 서변행각 5칸, 누상고 10칸, 중문 5처, 내위 34칸, 객사 20칸, 중문 2처, 향교51칸, 중문1처, 군수고 19칸 반, 공수 7칸, 관청 5칸, 창사 60칸, 각처장원 278칸” 그리고 참여자에 대한 이름과 실역 일자를 상세히 보고한다.

1789년 9월 28일 기사를 보면 “전체 이주대상은 319호, 집칸수 : 2417칸, 원가(元價) : 4818냥, 가급(加給) : 4394냥, 향전(合錢) : 9212냥, 돈을 받지 않고 머물기를 원하는 가호(家號) : 16호, 이미돈을 받고 잠시 머무는 가호 : 119호”라고 적고 있다. 이후 이주민에 대한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도세자의 묘 이장일이 10월7일이었으므로 그 이전에 모두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실록 1790.2.9일자 기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정조대왕은 1790년 2월 수원에 행차 때 동헌을 장남헌(張南軒)으로, 내사를 복내당(福內堂)이라고 지었으며, 사정을 득중정(得中亭)이라하고 모두 자신이 직접 글을 썼다. 그리고 신읍에 대한 소감을

“이번 행차에 수원부를 두루 살펴보니 신읍과 관청은 비록 규모를 이루었으나 민가는 아직 두서가 없고 움집도 아니고 보루도 아니고 마치 달팽이 껍질 같고 게딱지와 같다. 대도회를 이루는 것은 날짜를 기약할 수 없는 일로 구읍보다 좋게 하는 일은 조정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으니 개선계획을 마련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이상과 같이 신읍에 대한 기록은 극히 일부 내용만 기록하고 있다. 이는 현륭원 천봉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1790년 6월 18일 순조가 태어났다. 현륭원이 명당임이 입증된 것이다. 이때부터 정조의 갑자년 설인 1804년 임금 자리를 아들 순조에게 물려주고 화성에 와서 살겠다는 구상이 현실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수원하지초록 1790.7.15.일자 기사. (자료=서울대 규장각)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난 1790년 7월 15일 신읍 조성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수원부사 조심태는 수원하지초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신이 삼가 전날 받은 윤음(임금이 내린 말씀)의 내용에 의해 수원부 읍내민호(民戶)를 호구마다 적간(자세히 살핌)하여 구읍에서 이사온 민인(民人) 469호에게 모(牟) 2석씩, 원래 거주하고 있던 민인 63호, 옮겨 이사 온 협호민인(주인을 따라온 노비 또는 소작인) 46호, 타지방에서 이사 온 민인 141호 등에게 호구마다 모(牟) 1석씩 마련하여 도합 719호에 모 1188석을 나누어 지급하였음을 순찰사(경기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고 정조께 보고한다.

이는 왕자 탄신의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이후 정조의 갑자년 구상이 본격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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