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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48)] 심재덕의 수원사랑 이야기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의현미경

2021-12-08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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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2.06 04:35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해우재 개관식. (사진=해우재)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정비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전편 ‘이병희의 수원화성 복원 이야기’에서 밝혔듯이 수원화성 복원의 길을 연 사람이 이병희라면, 화성행궁 복원과 세계문화유산등재는 심재덕의 공로가 있었기에 오늘의 수원화성이 있다 하겠다.

2008년 5월 ‘상곡 심재덕 고희기념 헌정문집 발간위원회’에서 ‘Mr.Toilet, 당신과 함께라서 행복합니다’ 문집이 발간됐다. 그리고 2019년 1월 14일에는 ‘심재덕평전발간위원회’에서 주관하여 ‘미스터 토일렛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 심재덕 평전’을 김준혁교수가 집필하여 출간했다. ‘심재덕의 수원사랑 이야기’와 ‘화성행궁 복원, 세계문화유산 등재이야기’는 위의 책에서 발췌한 글임을 밝혀둔다.

심재덕은 1976년 공직을 마무리하고 수원의 구시가지인 구천동 공구거리에서 동서철강을 창업했다. 당시 사정은 말이 철강이지 자동차 하나 없는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당시 수원은 이병희 장관이 추진한 수원성곽복원정화사업이 한창 궤도에 올랐을 때이다.

동서철강 창립 16주년 기념행사 모습. (사진=해우재)

팔달문 일원의 시장은 활기를 되찾아 상가건물을 많이 지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성실하게 운영하여 고객들에게 인정받은 동서철강은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심재덕은 1980년 전국체전에서 모교(수원농고)출신 체조 6관왕이 된 김용환 군이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채 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수원농고체육관 조감도(현 광교체육관). (사진=해우재)

동문들과 김용환군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자는 운동을 벌여 800만원을 모금, 도와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체조전용 체육관이 없어 운동장에서 연습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체육관건립 운동을 벌이게 된다. 체육관 건립에는 당시 돈 3억원이 들어가는 사업이었다. 1만 여 동문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여 1982년 10월 30일 체육관 준공행사인 ‘광교제’를 개최했다.

이 곳에서 운동을 해온 박종훈 선수는 1986년 아시안게임, 88올림픽에서 각각 동메달을 따서 우리나라 체조경기 역사상 최초로 메달을 땄다. 광교체육관을 건립한 수원농고 동문회, 특히 기수별 동문회 조직은 후일 심재덕이 수원시장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87년은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민정당 대선 후보 노태우는 대통령직선제를 선언하는 6.29선언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수원의 문화계도 변화에 직면했다. 당시 이수영 문화원장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수원문화계는 새 시대에 부응하는 문화원장 물색에 나섰다.

심재덕 수원문화원장 명패. (사진=해우재)

당시 후보들 중에서 동서철강 대표로 지역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심재덕을 추대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 고사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간곡히 부탁하자 거절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심재덕은 1987년 9월 수원문화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수원의 문화발전을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은 문화원 운영 목표를 ‘시민들에게 친근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랑방’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수원문화원 활동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에 주력했다.

'수원사랑' 창간호 표지. (사진=해우재)

그래서 문화원 소식지를 만들기로 했다. 소식지의 이름을 ‘수원사랑’으로 정해졌다. 심재덕 원장은 창간호를 준비하는 편집위원들에게 “그저 수원문화계에 멍석을 한 장 깔아 놓는다고 생각하세요” 라고 당부했다. 편집위원은 이재영(수필가), 고 최범훈(경기대 교수), 임병호(시인), 송철호(음악인), 김상용(음악인), 남부희(화가), 김우영(시인 · 현 수원일보 논설위원)등이 고생해 1988년 3월 창간호가 출간됐다.

판형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포켓북이었다. 책자는 작았지만 수원문화계는 활기를 되찾았다. 수원사랑은 매월 발행됐다. 수원사랑 창간은 수원문화원 활성화의 신호탄이 됐다. 심재덕 원장은 문화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갖도록 해주었다. ‘수원사랑’은 잡지 이름뿐만 아니라 수원사랑을 담는 책이 됐다.

심재덕 원장은 활동의 중심을 수원화성에 두었다. “수원은 맥(脈)을 가진 도시입니다. 오로지 옛것을 가다듬고 문화와 예술의 고장으로 가꾸는데 모든 것을 바칠 생각입니다.” 심재덕은 수원의 여건을 살려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원성축성기념사업’에 공을 들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늘 봐 왔던 수원성(華城)은 심재덕에게 소중한 역사유적이자 안타까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는 파괴된 화성을 제대로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복원하지 못한 남쪽의 400여m 구간에 대해서도 아쉬워했다.

화성행궁터에 있던 수원의료원, 수원경찰서, 신풍초교, 여성회관 모습. (사진=수원시)

그리고 자신이 다닌 신풍초등학교가 화성행궁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곳은 이미 도립병원과 경찰서, 신풍초등학교, 경기도여성회관 등이 있어 행궁이 복원되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이는 수원사람들이 수원성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원시민들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수원화성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원화성축성 200주년이 되는 1996년에 대규모행사를 가져야 겠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 화성이 복원되기는 했어도 성곽주변에는 판자촌도 많았다. 그리고 성곽이 잘려있는 부분이 10여 곳이나 되어 성곽을 제대로 산책조차 할 수 없었다.

효의 성곽순례. (사진=해우재)

이러한 여건에서 ‘수원성축성 192주년 기념 시민 성 밟기’를 구상했다. 1988년 5월 5일 어린이날 수원성 일원에서 초중고생들과 대학생,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수원성곽 순례’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매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모여 출발했다.

순례코스 곳곳마다 난파소년소녀합창단의 합창과 수원공고 밴드의 축하연주, 경기대 탈춤반 및 국악협회 농악대, 신풍초등학교 관악대 등이 멋진 공연을 해주어 순례행렬에게 흥과 분위기를 한층 고조 시켰다. 심재덕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성곽 순례는 참여자들을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성곽순례는 회가 거듭할수록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91년 5월 5일 성곽순례는 화성축성 195주년 기념으로 ‘효의 성곽 순례’ 라는 이름으로 이름을 변경됐다. 이날 신풍초등학교 운동장에 1만5000명이 참가했다. 이 자리에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효의 성곽 순례’ 축하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효의 성곽 순례’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행사로 발전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자 문화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국민들의 욕구가 넘치기 시작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의 문화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꿈틀댔다. 심재덕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꿰뚫고 있었다. 이름하여 ‘한여름밤의 음악 축제’를 기획한 것이다.

올림픽개최기념 '한여름밤의 음악축제'. (사진=경기도 멀티미디어)

1988년 7월 23일~24일 양일간 수원 장안공원에 특설무대가 설치되고 공연이 개최됐다. 첫날 행사는 무려 1만 50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는 수원시민들이 문화에 굶주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의 아쉬운 점은 문화원이 주최했다는 이유로 시립교향악단과 합창단이 참가하지 않았다.

장안공원 주변에서 교통 혼잡이 발생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한여름 밤의 음악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했다. 이후에는 관악의 밤, 합창의 밤, 국악과 사물놀이의 밤, 교향악과 합창의 밤, 팝 페스티벌 등으로 세분화됐다.

그러나 모든 일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1991 한여름밤의 음악축제’를 준비할 때는 수목과 시설물의 파손 우려와 장안공원 재정비 공사를 이유로 공원사용이 승인되지 않아 수원시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는 문화원행사가 인기를 끌자 수원시 당국자의 시샘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자 심재덕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한 여름 밤의 축제장소 불허에 따른 우리의 입장’ 이라는 글을 신문에 광고 형식으로 게재했다. 신문을 본 시민들은 분노했다. 이런 분위기를 직감한 당시 이호선 수원시장은 대책회의를 통해 결국 공연을 허락했다. 그해 공연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중부일보 문화부장 김우영은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 당국과 장소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한 끝에 공연이 성사됐기 때문인지 시민들이 행사에 보내준 성원과 질서의식은 매우 인상 깊었다. 장안공원은 담배꽁초 하나, 휴지 한 조각 찾아볼 수 없이 청결했다. 이는 치밀한 준비도 있었으나 시민들의 수준 높은 질서 의식이 이룩한 작은 기적이었다” 이는 심재덕이 뿌린 작은 씨앗이 자라 수원 문화의 알찬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심재덕 문화원장은 수원천 복개중단과 팔달산터널 백지화, 서호를 시민 품으로 돌리는 사업에 매진하여 1995년 7월 1일 수원시장에 당선 되면서 수원시 중점사업으로 선정하여 모두 마무리 짖는 성과를 보였다.

그리고 ‘수원성곽 순례’행사를 진행하면서 생각한 화성행궁 복원 사업은 경기도가 화성행궁터에 있는 수원의료원 신축계획을 발표함으로써 불이 붙었다. 심재덕은 화성행궁복원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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