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창촌-수원시공약(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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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장촌’의 역사 파주 ‘용주골’ 문화명소로 탈바꿈 / 유곽의 역사 - 아미산하 |집창촌-수원시공약

2016-09-2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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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장촌’의 역사 파주 ‘용주골’ 문화명소로 탈바꿈 / 유곽의 역사 - 아미산하 유곽에서 파주 용주골까지, 집창촌 100년의 기록-블로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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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장촌’의 역사 파주 ‘용주골’ 문화명소로 탈바꿈   

박상돈 psd1611@naver.com 2016년 09월 27일 화요일


 

파주시가 슬럼화하는 파주읍 연풍리 ‘용주골’ 집창촌 일대를 문화명소로 조성한다.

26일 파주시에 따르면 최근 정부 3.0 창조문화 밸리 프로젝트 사업에 ‘용주골 창조 문화 밸리 프로젝트’ 사업이 선정돼 국비 104억 원을 확보했다.

파주시는 내년부터 2021년까지 ‘용주골’ 일대를 새로운 문화명소로 탈바꿈시킬 예정이다.

용주골 삼거리부터 연풍초등학교까지 1㎞ 구간의 건물 외관을 1960∼1970년대 모습으로 꾸며 창작문화거리로 조성된다.

빈점포에는 피규어와 미니어처, 압화 작가들을 입주시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또 파주시 최초의 극장 건물을 활용해 주민 커뮤니티센터로 조성하고, 보행자 전용도로를 만들어 관광객들의 편의를 높일 예정이다.

6·25 전쟁 때 미군기지가 들어서며 생겨난 용주골은 한때 2만여㎡에 성매매업소가 200여 곳, 종사자가 500∼600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큰 성매매 집결지 중 한 곳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미군기지가 이전한 데다 2004년 말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업소와 종사자 수가 크게 줄었다. 지금은 80여 업소가 200여 명의 종사자를 두고 영업하고 있다.

현재 용주골 지역 상점 230곳 중 80곳이 빈 점포로 남아있고, 지역 내 65세 이상 고령자 인구도 전체인구의 54%를 차지하는 등 경제가 쇠퇴하면서 문화 소외지역으로 전락했다.

주민들은 집창촌 등 쇠퇴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2014년 말부터 재개발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용주골 전체를 포함, 19만㎡에 아파트 건설을 위한 재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파주시 관계자는 “용주골은 대한민국이 가장 가난했던 시절 달러를 벌어들이며 우리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해왔지만, 이제는 오명만 남아있는 지역”이라며 “용주골을 새롭게 바꿔 대한민국의 문화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주민과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박상돈기자/psd1611@joongboo.com
▲ 파주시 '용주골'.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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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의 역사 - 아미산하 유곽에서 파주 용주골까지, 집창촌 100년의 기록-블로그 옮김

                                                                                                                                                                                                역사/문화 / Book

2012.05.0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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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의 역사 - 아미산하 유곽에서 파주 용주골까지, 집창촌 100년의 기록>


파주 용주골, 미아리 텍사스, 청량리 588… 한국 집창촌, 지워진 100년의 역사 

“오빠, 어디가? 잠깐 놀다가~.” 

야릇한 불빛 속에서 윙크와 함께 달콤한 말을 꺼내며 남자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그녀들이 있는 거리. 우리는 그곳을 ‘집창촌’이라고 불렀다. 지역마다 집창골목으로 유명한 거리가 하나씩 있을 만큼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집창촌이지만 도대체 그곳이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니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된 집창촌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전국의 집창촌을 탐방하며 그 역사의 원류를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이전의 조선에도 성을 판매하는 여성들이 있기는 했지만 요새와 같이 ‘전업형’ 성매매를 하지는 않았으며 그들이 모여 영업을 하는 공간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이 조선을 점거하면서 자국민을 위해 자국의 독특한 문화인 유곽을 들여다 앉혔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의 도입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집창촌 문화는 굴곡진 한국사의 흐름과 함께 시기마다 변모해가며 그 역사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사회는 집창촌을 이용하는 동시에 부정하고, 비난함과 동시에 요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며 타자화된 ‘그들의’ 역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모른 척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100년간의 끊임없는 변태(變態)기간 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스스로의 역사를 써온 집창촌의 숨겨진 이야기는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라는 폭탄을 견뎌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가 들여오고 우리가 번성시킨 환락의 거리 

우리나라 집창촌의 역사는 한때 아시아 최대의 매춘거리로 유명세를 탔던 부산 완월동 집창촌의 전신인 아미산하 유곽부터 시작된다. 개항지를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긴 성매매 업소들이 성병 예방과 풍기문란 예방이라는 명목 하에 실시된 일본의 정책을 빌미로 점차 한 장소에 집중되어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 첫 타자가 바로 아미산하 유곽이었다는 것이다. 한때 일본인만을 위해 운영되었던 이들 유곽은 철도의 발달과 함께 점차 조선 전국에 뿌리를 내리며 식민지 착취로 인한 빈곤에 시달리던 여성들과 자본주의적 성매매에 눈뜬 남성들을 빨아들였다. 


저자는 성매매의 번성이 유교적 전통을 갖고 있는 조선 사회에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주며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한다. 애인의 돈 때문에 팔려간 여자들의 사연과 포주에게 학대당하는 성매매 여성들, 등굣길에 있는 집창촌으로 인한 아동 교육 문제, 곤궁한 사회에서 비정상적인 호황을 누리는 유곽에 대한 개탄 등이 게재되어 있는 당시의 신문은 그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인정한 공창과 불법업체인 사창은 성구매 남성과 성판매 여성 수 증가와 함께 날로 번성해가며 사회문화의 하나로 정착하기에 이른다. 일본에서 유입된 집창촌 문화가 한국인들에 의해 환락의 날개를 펼친 것이다. 


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국가주도산업 

저자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공창제가 폐지된 이후를 ‘사창전국시대’라 명명했다. 일본 유곽이 있었던 자리들이 재빨리 사창가로 전환되면서 일제시대에 집창촌을 경험했던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집창촌을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50년에 발발한 6.25도 성매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전쟁 때문에 더더욱 곤궁에 빠진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성 판매를 했고, 현실을 잊고 싶은 남성들은 성 구매에 열을 올렸다. 


집창촌의 토대가 마련된 마당에 경제발전에 나라의 미래를 건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 상황은 더 우스꽝스럽게 변모해갔다. 겉으로는 ‘윤락행위 방지법’을 만들어 단속하는 척 하고 국민의 여론을 호도하면서 뒤로는 집창촌을 ‘특정지역’이라는 단어로 묶어 성매매를 묵인한 것이다. 정부가 이렇게 ‘공창 아닌 공창’을 운영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앞서 호황을 누렸던 일본인들이 성매매 관광을 와 뿌리고 가는 돈이 곧바로 국가의 외화획득 호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본 기생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며 흘러들어오는 외환으로 나라 살림을 챙겨나갔다. 일본뿐만이 아니다. 미군 기지촌의 활성화 또한 ‘최대의 우방’인 미국과의 동맹의 상징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에게 성병예방과 반공사상, 영어 등을 교육하며 기지촌 거대화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다. 저자는 이것이 사창이 만연한 시절 미군 기지촌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던 군사정권의 미봉책이었음을 드러낸다. 


물론 이 시기의 경제성장이 기생관광 외화만으로 충당된 것은 아니다. 국가 주도 산업화와 함께 수출이 증대한 것이 ‘한강의 기적’ 의 절대적인 이유였다. 이 시기 모두가 꿈꾸는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전국민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지만 끊임없는 생산성 증대 압력과 경제성장 압박은 나라의 미래와 함께 가정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 가장들에게 커다란 스트레스가 될 뿐이었다. 별다른 놀이 문화가 없던 살벌한 나날들, 가장들은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숨막히는 권력의 압제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성매매를 택했다. 사실 이것은 독재 정부가 ‘특정지역’을 만들면서 생겨난 암묵적 효과일 수 있다. 

‘조국근대화’라는 명목으로 경제성장의 음지이자 파생상품으로 커간 집창촌은 80년 이후의 5공화국 시절을 맞아 쿠데타를 가리려는 군부정권의 정책 아래 국민의 3S 서커스(Screen, Sports, Sex) 중 하나로 변모한다. 특히 올림픽 개최와 더불어 규제가 완화되면서 산업형 성매매와 음성적 매매춘이 등장해 성매매는 그 등장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포주의 학대와 잇단 집창촌 화재 등으로 점철된 윤락가의 역사는 결국 2004년 ‘성매매특별법’을 불러왔고, 법령의 강력한 시행에 힘입어 집창촌은 논란만 남긴 채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대한민국 성매매, 지지와 반대를 넘어서 

성매매특별법 제정으로 집창촌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저자는 마지막 단락에서 ‘집창촌의 현재와 미래(2005~)’라는 제목으로 ‘오픈 엔디드(Open-ended)’방식을 취한다. 성매매나 집창촌 문제는 늘 현재진행형이며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성매매특별법의 강력한 시행이 겉으로는 집창촌 해체라는 성과를 보이는 듯 했으나 실상 성매매가 음지로 숨어들어가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저자의 말은 안마시술소, 룸살롱 등, 편법형 성매매 집결지의 수적 증가가 증명해준다. 사실 성매매특별법에 의한 집창촌 해체 또한 공간 재배치를 위한 숨고르기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의 존폐여부를 떠나 성매매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성매매 업소는 물론 집창촌 역시 존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성매매 완전근절’이라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는 오히려 성매매를 어느 정도 묵인하겠다는 국가의 속내가 아니냐는 저자의 따끔한 한마디는 속 시원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성매매 선악 논란이라는 소모적 싸움에 앞서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으로 성매매 근절을 추구한다면 성매매 찬반 토론을 벌이기 전에 우선 여성들의 성매매 업소 유입을 원천적으로 막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낮은 여성 사무원 월급과 짧은 근속년수, 그나마도 없는 일자리 등, 갈수록 심각해지는 여성의 빈곤화는 성매매 유입 여성의 증가를 불러오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고용에 대한 정부의 빈약한 지원은 결과적으로 성매매 촉발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향락문화의 번성과 성 판매, 성 구매자의 도덕성을 탓하기 전에 건전한 노동의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무게감을 갖는 이유다. 

2007년 9월 23일은 성매매특별법 제정 3주년이 되는 날이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성업 중이던 집창촌은 이제 찬바람만 분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성매매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성매매특별법 3주년, 이제 법 시행 효과 여부와 그 긍정, 부정적 영향들을 점검할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성매매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와 함께 집창촌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비가시화된 집창촌을 가시화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집창촌이 우리 삶의 한 터전이자 문화의 소비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역사를 알아나가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의무일 것이다.

<유곽의 역사 - 아미산하 유곽에서 파주 용주골까지, 집창촌 100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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