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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연의 풍수기행] 수원 화성과 행궁 - 물 많은 水原… 보국지형 만나 탄탄대로 |수맥과건강,집터...

2017-03-25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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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연의 풍수기행] 수원 화성과 행궁 - 물 많은 水原… 보국지형 만나 탄탄대로

 

정경연 2017년 03월 23일 목요일
         
 
수원 화성과 행궁

수원은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다. 이 때문에 국토교통부와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는 수원화성이 완성된 날인 10월 10일을 기념해 ‘도시의 날’로 정했다. 본래 수원의 읍치는 지금의 융건릉이 위치한 화산 아래에 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팔달산 동쪽 기슭에 신읍을 건설하여 관아와 민가를 옮기도록 하였다. 당시 구읍에는 민가 221호에 676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정조는 10만 냥의 돈을 들여 백성들이 안심하고 이주할 수 있도록 이주대책을 세웠다. 그리고 매년 아버지 묘를 참배할 때마다 머물 행궁을 건립하였다.

행궁이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거처다. 팔달산 아래는 국세가 크고 앞이 트여 도시 및 진영 터로 합당하였다. 정조는 이곳을 큰 도시로 육성하여 왕권강화와 개혁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정조 13년(1789) 행궁과 객사, 향교를 조성하고 경기관찰사와 수원부사에게 신읍의 육성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정조는 백성들이 스스로 모여들도록 구읍보다 잘 꾸미고 생업에 재미를 붙이게 해주어아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수원 신읍에 사는 백성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해주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거리 양편으로 점포를 내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다. 유생들을 이주시키기 위해서 수원에 호적을 둔 사람만 응시할 수 있는 과거를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원 육성책은 효과가 있어서 해남에 사는 사람까지도 천리 길을 마다하고 이사를 해오는 경우가 있었다.

수원의 신읍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정조는 축성을 결심하게 된다. 정조 18년(1794) 2월 영의정 채제공을 총괄책임자, 정약용을 설계자, 경기관찰사 조심태를 건설책임자로 내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팔달산을 주산으로 자연 지세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산성과 평지성의 특성을 잘 살렸다. 성의 둘레는 4,600보(5,744m), 높이 20척(4.9~6.2m), 축성 재료는 돌과 벽돌을 함께 사용하였다. 정조는 한 명의 백성도 강제 노역시키지 않고 동원된 모든 인부에게 매일 임금을 지급하였다. 이 때문에 각지에서 인부들이 모여들어 2년 6개월 만인 정조 20년(1796) 8월에 완공되었다. 화성 축성공사에 대한 내용은 『화성성역의궤』에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화성이 완공되자 정조는 성내 중심부가 한양의 종로처럼 번화하게 할 방도를 강구하였다. 그 일환으로 한양·개성·평양·의주·동래 등의 거상들을 이주시켜 상업을 활성화시켰다. 이주한 거상들에게는 인삼전매권과 같은 특혜를 주기도 하였다. 또한 농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둑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확대하였다.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농업연구소를 만들었다. 오늘날 서호저수지, 농촌진흥청,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등이 수원에 있었던 이유다. 농사는 주로 군인들이 짓도록 하였다. 새로 개간한 땅의 2/3는 장용외영의 장교·서리·군졸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기반으로 군대를 길렀다. 땅의 1/3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분배하였다.

화성 신도시 발전이 활발하게 추진되자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 세력들이 강경하게 비판을 하고 나섰다. 자신들의 정치자금 줄인 거상들을 빼가고,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외영이 2만의 군사를 보유하고, 경제적 실력을 갖춘 상인들이 정치세력화 되자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노론 벽파들의 반격은 조직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정조를 뒷받침 해줄 정치세력은 힘이 약했다. 정국 주도의 한계를 느낀 정조에게 병마가 찾아오더니 재위 24년(1800) 49세의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이후로 수원은 오랜 침체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가 1967년 경기도청이 서울에서 수원시로 이전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 현재는 광역시급인 인구 120만 명의 거대도시로 자치단체 중에서는 인구가 가장 많다.

수원은 속리산에서부터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진 한남정맥이 정기를 받는 땅이다. 한맥정맥이 수원 북쪽을 지냐는데 그 선에 있는 산들로 형제봉(448m)·광교산(582m)·백운산(562.5m)·오봉산(205m)·수리산(431.6m) 등이 있다. 행궁으로 내려오는 맥은 백운산에서 시작한다. 파장고개에서 금당골을 거쳐 경기도교육청·영산공원·화서문을 통해 주산인 팔달산(145.5m)를 만들었다. 이곳으로 동쪽으로 내려온 맥이 수원천을 만나 멈춘 곳에 행궁이 자리 잡고 있다. 앞에는 형제봉에서부터 내려와 만들어진 일자문성이 안산이 된다.

팔달산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은 내청룡·내백호가 되어 행궁을 감싸고 있다. 팔달산 뒤 서쪽으로는 여기산(105m)과 칠보산(232.6m)이 받쳐주고 있다. 앞쪽 동쪽에는 청명산(190m)과 용인의 석성산(471m)이 있다. 북쪽에는 조종산인 광교산과 백운산이 있고, 남쪽은 융건릉의 주산인 화산(108m)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주변의 크고 작은 산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듯 감싸며 보국을 형성하였다. 보국의 크기에 따라 도시의 크기가 결정된다. 수원은 앞으로도 더욱 성장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수원은 다른 도청소재지와 달리 큰 강을 끼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원천천·수원천·서호천·황구지천이 여러 산에서 발원하여 병점 부근 황구지천으로 모두 합수한다. 물이 풍부한 고장이므로 지명도 수원이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이므로 수원이 경제력을 갖춘 자족도시로 발전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중 수원천은 광교산과 백운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수원성 내부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명당수다. 명당수가 자주 범람하자 정조는 버드나무를 심어 유천(柳川)이라 이름하고, 홍수·가뭄·폭염·수질정화·경관 등을 고려하였다. 팔달산에서 주변을 보면 수백 개의 산봉우리들이 모두 이곳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다. 그 모습이 마치 꽃송이와 같다하여 정조는 수원부의 이름을 화성으로 바꾸었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답지만 지고나면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수원은 화려한 문화융성을 통해 경제 발전을 도모해야 할 도시라 하겠다. 정조는 수원천이 남북으로 길게 흐르는 것을 버들잎으로 보았다. 그래서 수원성도 남북은 길게 동서는 짧게 하여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면 북쪽 모퉁이에서 세 굽이로 꺾이는 모습이 천(川)자 모양으로 유천을 상징한다고 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결국 화산과 유천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수원화성은 태평성대를 이루며 오랫동안 발전할 터라는 뜻이 된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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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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