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소식(이슈(3093)

내용보기 목록보기 요약보기

수원화성의 여러가지 종합=1,2.3,4,5,6 |-수원시 소식(이슈

2008-01-03 21:30

http://blog.drapt.com/jcyang/391131199363414192 주소복사

수원화성의 여러가지 종합=1,2.3,4,5,6
2008.01.03 21:26
http://tong.nate.com/jc5115/42698493
[1]화성시설과 관련한 용어해설
 
 
왜 화성을 쌓았을까?
 
 
 
왜 화성을 쌓았을까?
 
 
화성 답사를 하다보면 아래와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를 좀더 쉽게 풀어보기 위하여 용어설명을 준비하였습니다.


각루(角樓) ; 성의 굴곡부, 우각부, 돌출부 등의 모퉁이에 지은 다락집
감동(監董) ; 옛 성역, 국가 공역을 맡아보던 관원
강회(剛灰) ; 자연산석회를 900 ~ 1300℃ 가열하여 탄사가스와 물이 발산된 산화칼슘
강회다짐   ; 강회를 피어서 일정 비율로 모래와 백토 또는 황토를 혼합, 물반죽하여 다짐
개판(蓋板) ; 홍예성문상부에 덮은 판자로, 일반적으로 홍예 성문은 안팎에 만 돌로 쌓고 성문 내부는 마루 형식으로 판자를 덮었음
거중기(擧重器) ;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이용되는 기구로 틀.도르래.밧줄 및 줄감개로 구성된 기구. (현대의 기중기와 비슷)
고란층제(高欄層梯) ; 중층(重層)을 올라가는 난간 층층다리
곡란층제(曲欄層梯) ; 난간을 구부려 만든 층층다리
곡성(曲城) ; 성문 밖으로 앞을 가리어 반달 모양으로 구부러지게 둘러 쌓은 성. 옹성
공심돈(空心墩) ; 성에 있는 돈대(墩臺)의 일종. 두꺼운 벽으로 원형 또는 방형으로 쌓아올린 속이 빈 약간 높직한 누대.
공안(空眼) ; 총안. 총혈. 누혈. 구멍 등의 총칭
규형(圭形) ; 성의 몸체 즉 체성(體城)이 밑에서부터 점차 위로 올라가면서 곡선으로 휘어 올라간 형태
근총안(近銃眼) ; 여담에 구멍을 내어 가까운 곳을 쏘기 위해 경지게 뚫어 놓은 구멍
기단(基壇) ; 성벽이나 건물을 축조할때 제일 맨 아래 단의 기초
나성(羅城) ; 이중으로 성을 둘러쌓은 경우 바깥쪽에 있는 성. 외성.
내탁(內托) ; 성벽을 축조할 때 성의 내벽을 쌓는 일
노대 ; 원거리에 활을 쏘기 위해 성 안에 성보다 높이 만든 대
누(壘) ; 작은 성. 보루(堡壘). 성채(城寨)
누(樓) ; 높게 놓은 마루(누마루).
누대(樓臺) ; 높은 대 위에 높이 세운 누각(樓閣)
누문(樓門) ; 2층 누다락으로 지은 대문. 또는 궁성. 성벽의 홍예문 위에 누각을 지은 것
누삼문(樓三門) ; 성벽 위에 누각을 짓고 그 밑은 홍예문을 낸 것
누조(漏槽) ; 물이 흘러 내리도록 만든 홈이나 홈통의 구조물
단확 ; 곱고 빨간 빛깔의 흙. 일명 단사(丹砂)라고도 함.
담장 ; 집의 외곽을 둘러막아 벽처럼 만든 구축문
대(臺) ; 성(城), 보(堡), 둔(屯), 수(戍) 등의 동.서.남.북에 쌓아 올린 장수의 지휘대
돈대(墩臺) ; 성 안 높직한 평지에 높게 축조한 포대(砲臺)로 그 안은 낮고 외부는 성곽으로 축조하여 포를 설치함
돌홍예 ; 무지개 즉 반원 모양으로 성문을 내기 위해 인장(引張)이 약한 돌을 압축으로만 하중을 하부에 전달시키는 구조법
망루(望樓) ;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지은 누다락집
목책(木柵) ;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
무사(武砂) ; 크기가 크고 잘 다듬은 성돌(城石)로써 문 옆의 석면(石面)을 만드는 것.
무사석(武砂石) ;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성벽이나 담벽 등에 높게 쌓아올리는 돌. 사각형으로 다듬은 큰 돌
문루(門樓) ; 궁문. 성문이나 지방 관청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초루
미석(眉石) ; 석성의 상부, 여장 밑에 여장을 쌓기 위해 눈썹처럼 판석을 약간 튀어나오게 설치한 돌
바른층쌓기(整層積) ; 석축할 때 돌의 수평줄 눈이 각 단마다 일직선이 되게 쌓는 일
반원옹성(半圓壅城) ; 평면이 동그스름하게 반월형으로 된 옹성.
반월성(半月城) ; 성곽의 평면 형태가 반달모양으로 된 것. (예: 경주월성, 부여 반월성)
방안(方眼) ; 사각형으로 뚫은 구멍
번와(燔瓦) ; 기와를 굽는 일
번와(番羽)(瓦) ; 기와를 갈아 끼우는 일.
벽루조 ; 빗물을 배수하기 위해 성곽에 만든 홈이 파인 석조. 또는 벽돌로 만든 수조(水槽)
벽성 ; 벽돌로 쌓은 성
성곽(城郭) ; 성의 둘레. 내성과 외성전부. 성은 내성.곽은 외성을 뜻함
성기(城基) ; 성의 기초, 성의 터전
성루(城樓) ; 성문이나 성벽 위에 높이 세운 건물
성문(城門) ; 성곽에 낸 문. 성벽의 문
성벽(城壁) ; 성의 담벼락, 성을 이룬 수직에 가까운 벽(장)
성석(城石) ; 성돌. 즉 성벽을 이루는 돌
성신(城身) ; 성의 몸체, 성체.체성
성역(城役) ; 성을 쌓거나 수축하는 일
성제(城制) ; 축성의 방법
성지(城址) ; 성 터, 성을 쌓았던 자리
쇄석(碎石) ; 막돌.잡석 등을 인공적으로 깨뜨려 만든 돌
쇠뇌 : 활을 발전시킨 것으로 나무틀에 화살을 얹어 날려보낼 수 있도록 만든 기구
수구(水溝) ; 성벽 주변에 파놓은 개울
수구(水口) ; 물을 끌어들이거나 흘러나가게 한 구명 또는 입구
수구문(水口門) ; 성문 밑에 개구부를 내어 개울물이 흐르게 한 문
수문(水門) ; 성 안팍의 물을 통과시킬 수 있게 만든 장치
암문(暗門) ; 성벽에 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꾸민 작은 성문
여담(여장女墻) ; 성 위에 있는 낮은 담이며 총구와 타구가 있는 구조물로서 성가퀴의 일종. 여첩
사괴석(四塊石) ; 20~25㎝ 내외 입방체형의 석재.한 사람이 4덩이를 질만한 크기의 돌에서 나온 말. 사고석
사모봉(紗帽峰) ; 성곽축조의 지형으로 사모 모자와 비슷한 지형
사혈(射穴) ; 성벽에 내리뚫은 장방형의 구멍.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되어 있음. 총안
산탁(山托) ; 성벽 축조시 안팎으로 쌓는데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기대 쌓는 경우. 즉 바깥쪽만 성벽을 축조하는 것.
석누조(石漏槽) ; 돌로 만든 물 홈통.
석성(石城) ; 성벽을 쌓을 때 돌로 축조하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성곽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
석축(石築) ; 돌로 쌓음. 돌로 쌓아 만든 축대
석축성(石築城) ; 돌로 쌓아 만든 성
영조척(營造尺) ; 곡척의 1.099척에 해당되는 자. 약 31㎝내외
옥개부(屋蓋部) ; 건물이나 여담의 지붕 부분.
옥개석(屋蓋石) ; 건물이나 탑 등의 지붕 재료로 쓰이는 돌
옹성(壅城) ; 큰 성의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반원형 또는 방형으로 쌓은 성. 옹성문(壅城門) ; 성문으로 들어가는 곳에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쳐 놓은 옹성이 딸린 문
외성(外城) ; 성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경우 바깥 성
용도(甬道) ; 양쪽에 여장을 쌓아 외성 또는 돌출 치성에 통하게 한 길
우석(隅石) ; 석축을 할 때에 모퉁이에 쌓는 돌
은구(隱溝) ; 은밀하게 물을 빼기 위해 땅 속에 묻은 수채나 수구(水溝)
읍성(邑城) ; 한 도읍 전체를 둘러싸고 군데군데 문을 내어 외부와 통하게 만든 성. 또는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고을에 축성되어 있는 성.
잠자리무사 : 홍예와 홍예를 잇대어 쌓은 뒤 벌어진 사이에 처음으로 놓는 돌. 윗면과 앞면은 평평하고 양 옆은 동그스름하게 다듬고 밑은 맞닿아서 뾰죽하게 됨. 청정무사
장대(將臺) ; 성. 보. 둔. 술(戌) 등지에 높게 쌓아 올린 장수의 지휘대
장대(墻臺) ; 성가퀴 죽 여담의 토대
장대석(長臺石) ; 네모지고 길게 다듬은 돌. 섬돌 층계나 축대. 지댓돌 따위에 쓰임.
재성(在城) ; 임금이 평시에 있는 성
적대(敵臺) ;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누대. 사면에 담을 쌓고 성 안에 올라갈 수 있는 층층대가 성 밖으로 화살이나 총을 발사할 수 있게 되어 있음.
적루(敵樓) ; 치(雉) 위에 적을 관측하기 위하여 높다랗게 지은 다락집. 포사(舍甫)(舍)
전(專瓦) ; 흙을 장방형 또는 방형으로 구워 만든 건축용재
전돌평축성(塼石平築城) ; 벽돌로 쌓아 올린 성
전석(石專)(石) ;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 검정벽돌
전축(石專)(築) : 벽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은 것
채석(採石) ; 돌을 떠내는 일.
채석장(採石場) ; 석재를 떠내는 곳
채토장(採土場) ; 객토(客土), 보토(補土) 또는 성토(盛土)를 위하여 흙을 파내는 장소, 토취장
책(柵) ; 나무를 둘러친 울타리
책성(柵城) ; 목책으로 둘러쳐진 성
철여장(凸女墻) ; 상부가 凸형으로 된 여장
철엽(鐵葉) ; 성문 등에 박아대는 철판 쪽. 대문짝에 박는 장식의 하나
첩(堞) ; 성가퀴. 여장(女墻). 여첩(女堞)
첩담 ; 성 위에 설치된 성가퀴, 즉 여장(女墻)
체성(體城) ; 성곽의 부속 시설을 제외한 성벽의 몸체 부분.
초 ; 성 위에 만든 누각. 초루. 문루.
총안(銃眼) ; 성벽의 여장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총이나 활을 쏘게 되어 있는 구멍.
                  예 : 근총안(近銃眼). 원총안(遠銃眼)
층루(層樓) ; 2층 이상으로 높게 지은 누다락집
층제(層梯) ; 여러 층으로 된 사다리.
치(雉) ; 성벽 바깥에 4각형으로 덧붙여서 만든 성벽인 치 위에 집은 없이 여담만 있는 것. 대개 각(角)을 이루고 있는 것을 치성. 둥근 것을 곡성(曲城)이라 한다.
치첩(雉堞) ; 성벽의 시설물로 치와 성가퀴
타(土朶) ; 살받이 타, 즉 화살을 막기 위한 체성 위의 구조물. 또는 타구와 타구 사이에 한 구간을 세는 단위
타구 : 성벽 위의 여장 구간마다 잘린 부분. 구간의 凹된 구간
타원형아치 : 홍예의 모양이 타원형인 것
타첩 ; 타구와 성가퀴. 타구를 낸 여장
평성(平城.坪城) ; 평지에 쌓은 성(平地城)
평여장(平女墻) ; 여장의 상변이 평평하게 된 여장
포루(砲樓) ; 성을 효과적으로 방비하기 위해 성벽을 돌출시킨 치 위에 대포를 쏠 수 있게 장치한 누각.
해자(垓字,海子,海字) ; 성 밖에 둘러판 못
호(壕,濠) ; 성 바깥 둘리에 도랑처럼 파서 돌린 것
호박돌 ; 개울에 있는 둥그런 막돌. 지름이 20~30㎝정도의 개울산의 자연석
홀(圭) ; 옛 관원의 패로서 활처럼 휘어져 있음. 성벽이 이런 모양이어서 규형(圭形)이라 함.
홍석(虹石) ; 홍예 중앙마루에 놓은 홍예요석
홍예 ; 문얼굴의 윗머리가 무지개 같은 반원형
홍예문 ; 돌, 벽돌 등으로 쌓아 위가 반달형으로 된 문
홍예받침석 ; 홍예의 양쪽 끝을 받친 큰 방각석(方角石)
홍예석 ; 홍예를 틀 때 쓰이는 한쪽이 넓고 다른 편이 조금 좁게 사다리꼴로 만든 돌. <화성연구회 제공>
 
 
 
 
[2]왜 화성을 쌓았을까?
축성 동기
화성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정신이 스며있는 문화유산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정조대왕은 부친 사도세자에게로 향한 효심 때문에 수원 땅 에 전국 최대 규모의 화성행궁을 짓고 화성을 축성했다고 한다. 

즉 지극한 효심으로 인해 임금의 능행차 대열이 묵어갈 화성행궁이 세워졌고, 수원이라는 신도시와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정조대왕의 효심은 '출천지효(出天之孝)'라고 할 만큼 지극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사도세자의 능을 지키던 능참봉이 '어렵사리 능참봉 자리 하나 얻었더니 임금님 행차가 한달에 스물아홉번이더라'고 한탄을 했다는 전설까지 내려올까? 

정조대왕은 아버지의 능침을 이곳 화산(융릉, 건릉)으로 옮기고 자주 참배 를 하러 행차를 했다. 그리곤 능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내려 올 줄을 몰랐다고 한다. 
너무 울어서 눈에 피눈물이 흘러 내렸고, 탈진 상태에 이른 임금을 노정승 채제공이 업고 내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하긴 정조대왕의 나이 열한살에 목격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은 평생의 한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꼭 효심 하나 때문이었을까? 
효심 하나만으로 옛수원 땅에 아버지의 능을 옮기고 그곳에 살던 백성들을 현재의 수원 땅으로 이주케 했을까? 더욱이 국가의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신도시와 화성을 건설하는가 하면, 전국 최대 규모 의 행궁 등을 축조했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해석은 이렇다. 
우리시 학예연구사 이달호씨(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이사)는,"화성의 축성 동 기에는 정조대왕 의 효심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노론으로 대표되던 수구 집권세력 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이상이 담긴 새로운 개혁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고 말한다. 

서울대 한영우교수도 "화성 건설의 표면적인 이유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 덤을 정조 13년 (1789) 양주 배봉산 밑(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경내)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자 주 참배하여 효 성을 다하기 위함이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이곳에 인근 부자들을 이주해 살게 하고, 친위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외영(壯勇外營)이라는 정예 군대를 배 치했으며, 서울과 화성 사이에 신작로를 개설했다. 또 화성에서 주요 정사를 집행한 사실을 종합해보면 여러 가지 정치적인 목적이 복합돼 있음을 엿볼 수 있다"고 분석한다. 

실학자 반계 유형원(1622~1673, 광해군 14~현종14)은 일찍이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수원이 대도시가 번창할 곳으로 예견했다. 
반계는 역대 문헌과 사상가의 견해를 자세히 고증하고 현실에 근거한 실사 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하여 진리를 탐구함)의 방법론과 개혁사상을 펼친 인물로 '실학 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의 주장은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이 되었으며 후세의 실학자 성호 이익, 안정복 등으로 이어진 실학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뒤 에 다산 정약용 등에까지 미쳐 실학이 집대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계수록'은 말로만 수필의 형식이지, 사실은 정치·경제·군사·정부 등 국가 전체 제도 에 대한 폐단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총체적인 개혁안인 것이다. 

정조대왕은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세력인 노론 벽파에 맞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세력으로 개혁적 성향의 실학파가 많이 포함된 남인들을 선호했다. 
따라서 화성 축성 공사 때 남인·실학자들이 앞장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앞에서 한영우 교수도 밝혔지만 정조대왕은 단순히 효성 때문에 '성곽의 꽃'이라고 일컫는 화성을 건설하지 않았다. 이는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에 해당하는 최정예부대인 장용외영을 수원에 설치한 것을 비롯해 최대 규모의 행궁을 짓고 신도시의 상업진흥과 인구 증대에 크게 신경을 쓰는 등 수원을 서울에 버금가는 대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데서도 드러난다. 

정조대왕으로서는 뿌리깊은 정치세력인 노론들이 대거 살고 있는 서울에서 새로운 정치 개혁을 펼치기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을 선택하게 되고 여기에서 젊고 개혁적인 남인·실학자들과 어울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일 게다. 

학자들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서울에서 하지 않고 굳이 수원에 내려와 서 온 나라가 떠 들썩하도록 성대하게 치렀던 것은 이런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또 능행차를 하면서 백성의 민원을 직접 듣는 격쟁(擊錚)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속시킴으로써 노론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직접 다가가서 신임을 얻는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는 추론(推論)도 설득력이 있다. 

특히 정조대왕은 수원을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초대 유수로 남인의 지도자이자 영의정인 채제공을 임명할 정도로 이곳에 쏟는 애정이 컸으며, 능행차 때는 수원에서 문·무과 과거시험을 실시해 인재를 뽑기도 했을 정도였다. 

한편 정조대왕은 왕위를 내놓은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화성행궁의 '노래당(老來堂)' 이니 '미로한정(未老閒亭)' 같은 건물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것. 
정조대왕의 원대한 꿈은 1800년 대왕의 서거 이후 노론에 의한 대대적인 남인 박해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200여년이 넘게 흐른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정조와 화성이 역사·문화 ·예술·관광의 화두가 되고 있다. 
정조의 효심과 개혁정신으로 축성한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으며 정조시대의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으로 발표되어 인기를 끌었다. 

어디 그뿐인가? 일제에 의해 파괴됐던 화성행궁은 이제 복원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머지 않아 일부를 제외한 전 시설들이 웅자(雄姿)를 드러낸다. 

수원에서 정조대왕의 정신은 다시 부활하고 있다. <김우영 주간>  
 
 
 
 
[3]'수원성'은 옛 수원의 터에 있다
 ‘화성’은 일제 시기 이후 얼마 전까지 ‘수원성’이라고 불렸다. 

이를테면 남쪽에 있는 산을 남산, 북쪽에 있는 문을 북문이라고 불렀듯이, 수원에 있는 성이므로 일인들이 그냥 수원성이라고 부르게 된 이후 이 명칭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다행히 10여년전 서지학자인 고 이종학 선생을 비롯한 뜻 있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화성’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았고 지금은 이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러면 수원성은 없을까? 
아니, 화성과 함께 수원성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수원성은 수원에 있지 않고 다른 지역에 있다. 

어디냐 하면, 옛 수원이 자리했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와 봉담면 와우리에 이르는 지역이다. 
다시 말해서 와우리의 수원대학교에서 융·건릉으로 넘어 가는 곳, 경성종합고등학교 남쪽에 있다. 

일반적으로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이라고 불리는 토성(土城)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토축(土築)이며 주변 둘레가 4천35척(1척은 30.303cm)’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은 상당 부분이 훼손된 상태다. 

성벽은 건릉 북쪽 해발 86.4m의 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가 수원대학교 옆 길까지 약 270m가 남아 있다. 
안쪽 경사면의 높이는 약 4.5m, 바깥 경사면 의 높이는 7.6m 정도이며, 상단부의 폭은 2m 가량이다. 
주민들이 길이 나있는 지역을 고서문(古西門)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옛날 이곳에 수원고읍성의 서문이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일부에서는 고수문(古守門)이라고도 부른다.

남아 있는 토성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서편 성터는 고서문으로부터 수원대학까지 약 160m의 토루(土壘)가 남아 있었으나 민가가 들어서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원래 수원고읍성의 토루는 고서문으로부터 도로 건너 수원대 도서관까지 연결되고 수원대를 거쳐 수기리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문화유적 총람’에는 ‘수기리 성지는 화성군(현재는 시) 봉담면(현재는 읍) 수기리 3-2, 4-1의 경계, 태안면과의 경계에 높이 약 3.5m의 토루 360m 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흔적이 없다’라고 기록돼 있다. 

수원고읍성의 남문터는 융·건릉 건너편 형주건설 서쪽 도로변에 있으며 길이 21.7m, 폭 8m, 높이 2.1m의 토루가 남아 있다고 한다. 
또 동편 산 쪽의 성안에는 고분으로 보이는 터가 있는데 이미 도굴을 당해 노출된 단면이 남아 있다. 

수원고읍성의 성벽은 북쪽의 경사도가 남쪽의 경사도보다 심해 북쪽 지역에 대한 방어가 주목적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 성터에서 채집되는 유물로 보아 축성 시기는 삼국시대까지는 미치지 않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이 성은 수원읍치(邑治)를 보호하기 위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수원부의 읍치는 정조 13년(1789) 양주 중량포 배봉산(현 서울시립대)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을 옛 수원부읍치(현 융·건릉)로 옮기면서 현 팔 달산 아래로 이전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기록에 보면 수원은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모수국(牟水國), 고구려시대에 매홀(買忽), 통일신라 시대에 수성군(水城郡), 고려시대에 수주(水州),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등으로 불려져 왔던 유서 깊은 고장이었다. 
또 한반도의 중부권에 위치한 삼국 쟁패의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남양(南陽) 이라는 대 중국 해상 교역의 관문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중요한 지역으로서 항상 주목을 받아 왔다. 

어디 그뿐인가?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바다와 멀지않아 각종 해산물들이 풍성하다. 
따라서 이렇듯 중요한 지역에 읍성이 만들어진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이병도씨의 ‘한국고대사연구’에 따르면 ‘모수국은 광개토호태왕비문(廣開土好太王碑文)의 백제 정벌 58성에 나오는 모수성(牟水城)으로 생각되며, 수원 옛 이름 중의 수성(水城), 수성(隨城)이 있으므로 아마 수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위에서 소개한대로 삼국시대 이전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필자는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모수성·수성’이라는 이름이 아마도 수원고읍성의 원래 이름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수원고읍성은 비록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조대왕과 부친 사도세자(장조)께서 편안한 휴식을 누리실 수 있도록 옛 수원 고을 화산 일대를 아늑하게 감싸 안고 있다. 
수원고읍성은 비록 현재의 행정구역상 수원 땅은 아니지만 이 일대가 수원의 뿌리라는 점에서 관심 있는 분들의 답사와 보존 노력이 더욱 요구된다. <김우영 주간>
 
 
 
[4]화성에 담긴 조선의 정수
화성의 축성과 배경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정조 18년(1794) 정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보다 5년 앞선 정조 13년(1789) 국왕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묘원(영우원)이 양주군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에서 지금의 융릉(현륭원) 자리로 옮겨오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용주사를 세워 아버지의 슬픈 영혼을 위로해주는 원찰로 삼게 된다.
그러나 국왕 정조가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기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묘원 자리 바로 앞에 수원부의 관아가 자리해 있었고, 많은 주민이 묘원 근처에 살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지 관아와 주민을 이주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또 만만치 않은 이주 비용도 문제였다. 어디로 어떻게 이주시켜야 할 것인가.
현륭원 자리를 고를 때 고산 윤선도(1587~1671)가 골라 놓은 효종의 능침 후보 자리를 선정하였듯이, 또 원찰로 세운 용주사가 갈양사의 옛 터전이었듯이, 이 문제도 선인들의 견해가 반영되었다. 바로 조선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 군현제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반계 유형원은 수원이 더 큰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20리 쯤을 북상한 팔달산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팔달산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삼으면 좋을 것이며 그렇게 하면 마땅히 큰 도시로 발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밝혔다.
정조는 훌륭한 묘원 자리를 추천해 놓은 고산 윤선도와 새수원의 터전을 골라놓은 반계 유형원의 벼슬을 추증해 주고 그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새수원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관아를 옮겨오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에 큰 돈이 들었다. 20리밖에 되지 않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가옥 보상비와 위로금까지 주었지만 그래도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렇게 새수원을 건설하는 데 삼사년이 흘렀다.
정조 17년(1793) 정조는 아버지의 원침이 있는 수원의 체모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름도 화성유수부로 개명했다. 북쪽의 개성, 서쪽의 강화, 동남쪽의 광주에 이어 서울을 남쪽에서 보위하는 또 하나의 유수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새도시 수원을 에워쌀 화성의 건설을 계획한다. 국내외 여러 성들을 비교 분석하여 장점과 단점을 도출해내고 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최고의 성을 건설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화성의 건설은 정조 18년(1794) 정월 초이렛날 시작하여 34개월만인 정조 20년(1796) 9월 10일 끝나게 된다. 4600보에 이르는 화성과, 화성의 핵심인 행궁(576칸)의 건설까지 마쳤던 것인데, 중간의 공사 중지 기간을 빼면 28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이다.

계획된 신도시 수원

손정목씨는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라는 저서에서 지금의 수원을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고 규정하였다. 그것도 농업과 상업을 기반으로 한 자족적인 도시로서 신도시가 지녀야 할 요건을 모두 충족한 모범 도시라고 했다.
정조는 새수원을 건설하면서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라.’(戶戶富實, 人人和樂)고 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의 신도시에 대입해도 좋은 말이다. 물리적인 도시 계획에 앞서 이념적으로 정리해야 할 바탕인데 새수원 건설의 배경은 이렇듯 훌륭하였다.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정조는 만석거라는 저수지를 만들었고, 저수지 아래 땅을 개간, 대유둔이라는 국영 농장을 두어 화성을 지키는 기본이 되게 하였다. 또, 상업을 진작시키기 위해 인삼. 관모 등의 독점 판매권을 수원의 상인들에게 주었다. 정조는 새수원을 자신의 아버지 묘원이 있는 고향으로 생각하였고, 당 시대의 역량을 모두 모아서 눈에 보이는 화성과 보이지 않는 화성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실학의 도시 화성

새수원은 출발부터 실학과 연결된다. 반계 유형원의 실학 사상이 새수원의 길을 열었고,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이 축성에 이바지하였다. 더구나 시대적인 흐름은 실학 정신을 현실에 투입하지 않고는 안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명이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또한 상업과 농업의 발달로 인한 경제 구조의 재편성은, 그때까지 조선을 이끌어왔던 성리학을 지극히 공리공담적인 구학으로 여기게까지 되었다.
정조는 아마 화성을 조선 실학의 실습장으로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국가의 통치 전반에 활용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부류의 반대 또한 지나칠 수 없는 걸림돌이다. 또 기득권층의 저항도 충분히 예상된다. 이 모두를 피해가면서 현실에 적응시키는 방법으로도 화성을 건설했을 것이다.
기계나 기구의 개발과 활용은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경비를 절감하면서 공역 기간을 단축시키는 지름길이다. 이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백성을 위한 화성

화성에는 국왕의 애민정신이 가득 담겨 있다. 설계를 변경해가면서까지 주민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과 공역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점, 그리고 척서단. 제중단 등의 환약을 내려주고, 무더위와 인건비 미지급으로 인한 공사의 일시 중지 등은 애민정신의 소산이다.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새수원의 건설 계획에는 성의 축조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비답을 내린다. 성을 확장한다는 것은 국고의 손실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는 곧 국고의 손실보다 수원 주민을 우선했다는 말이다.
무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 정조는 화성 성역에 참여하고 있는 공역자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척서단滌署丹을 지어 하사한다. 더위 먹은 데 먹는 환약을 특별히 지어 내려준 것이다. 약을 지급 받은 사람들은 약의 효능보다 국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더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감동은 곧 최고의 성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
화성의 특성

화성은 기존 성들이 안고 있었던 모든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건설된다. 동서남북 사대문을 건설하면서 모두 옹성을 설치하였고, 적재적소에 치성을 두었으며, 여장의 높이를 높여 군사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이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밝힌 조선 성들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요소요소에 암문을 설치하여 비상 사태에 대비하였고, 남북 수문을 두었는가 하면, 군사적인 위엄을 담은 장대를 동서에 건설했다.
치성(雉城)의 제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치성은 성벽을 중간중간 돌출시켜 쌓은 것을 말하는데 꿩이 제 몸은 감추고 남을 잘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러한 치성이 없거나 적당한 장소에 있지 않으면 적군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파괴하기 쉽다. 과거의 성들에도 치성이 있지만 그 활용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화성에 건설된 치성들은 다각도로 모색되었다. 순수하게 치성의 역할만으로 건설되기도 하고, 대포를 장치하는 포루砲樓를 겸하거나, 치성 위에 집을 지어 군사를 보호하려고 한 포루鋪樓도 있다.
성의 동남쪽, 서남쪽, 서북쪽, 동북쪽에는 모두 각루角樓를 두었다. 이는 화성의 다섯 군영 체제를 보완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행궁에 중영中營(신풍위新風衛)을 두고 동에는 창룡위蒼龍衛, 서에는 화서위華西衛, 남에는 팔달위八達衛, 북에는 장안위長安衛를 두었는데, 중간의 요소에 네 각루를 두어 각 위衛를 보충해주는 동시에 부장副將이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각 각루의 위치는 빼어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휴식 공간으로써의 역할도 컸다고 보여진다. 그 중 제일은 동북각루인데 용두각으로 불리기도 하는 방화수류정이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정자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다고 할만한 정자인데 동북각루라는 집 이름이 말해주듯 군사적인 목적에 의해 세워진 시설이다. 적군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빠져 있을 때, 마루 밑의 총구와 포구에서는 사정없이 불을 뿜을 것이다.

화성 봉돈烽墩은 단순한 봉수대의 역할을 뛰어넘은 요새다. 우선 봉돈 자체가 하나의 치성으로 쓰이며, 많은 총구를 뚫어 자체 방어력을 갖추었으며, 행궁과 서장대를 마주보며 국경과 해안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화성의 건설에서 벽돌의 사용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북학파 실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벽돌집의 제도를 조선에 이식시키는 과정이 화성에 담겨 있다. 성의 중요 시설물은 대개 벽돌을 활용하였고, 건축물의 일부분도 벽돌로 쌓았다. 그래서 화성을 축성 재료로 분류할 때 다른 곳에는 없는 석전교축石塼交築의 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화성의 평면은 나뭇잎을 닮았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순응하며 성을 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조의 애민정신에 의한 성의 확장으로 인해 더욱 완벽하게 나뭇잎을 닮았다.
화성은 여러 기능들을 한 시설물에 복합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다기능을 강조하면 외형을 놓치게 되고, 외형을 강조하다 보면 기능성에 문제가 있게 된다. 이 배반적인 요소 둘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힘은 문화적인 능력이 탁월했을 때 가능하고, 탁월한 문화적 능력은 튼튼한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화성은 이렇듯 조선의 정점에서 건설된 것이다.

공사 실명제의 완벽한 구현

화성의 건설은 완벽한 실명제로 완성된다. 성역의 처음과 끝을 모두 기록한 공사보고서를 펴낸 것이다. 국가의 재정이 많이 들어갔고 백성의 피땀 어린 정성이 훌륭한 결과를 낳았으므로 보고서의 간행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화성의 성역이 한창 진행되던 정조19년(1795) 윤 2월에 수원에서는 커다란 잔치가 열렸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렸던 것이다. 화성에 대한 정조의 애착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이 잔치의 모든 것을 책으로 펴냈는데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라는 책이다. 이 책의 간행에 앞서 정조는 국가의 모든 행사를 낱낱이 정리해 놓을 요량으로 정리의궤청을 설치하였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간행은 화성성역 공사보고서의 간행에 본보기가 되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고 제목을 단 이 책에는 공사의 논의 과정과 관청 사이에 주고 받은 공문서, 임금의 의견과 명령 등 진행 과정을 기록했고, 공사 참여자의 이름과 공역 일수, 각 시설물의 위치와 모습 및 비용들을 낱낱이 실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그림을 그려서 이해를 돕기도 했다. 공사비에 대한 대목에서는 각 공역에 들어간 경비를 산출하였고, 인건비(일당)와 공사에 참여한 일수 등도 상세하게 기록해서 석공 아무개가 어느 고장의 출신이며, 어느 현장에서 몇 일을 일했으며 얼마의 돈을 품값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어느 시설물이든지 건축 자재를 하나하나 기록했고, 그 비용을 산출했으며 성 안팎에서 본 그림을 따로 그려 이해를 도왔는데 부득이한 경우엔 실내의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기계들은 부품까지 따로 그려서 설명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이 공사보고서가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이다.
지난 70년대 화성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분적인 보수를 해오고 있다. 그럴 때마다 화성성역의궤가 교과서로 등장하는 것은 기본이다.
화성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에도 화성성역의궤는 한몫을 톡톡히 했다. 200여년 전의 완벽한 공사보고서에 세계가 놀란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들어 있는 실명제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현장에서도 그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창룡문과 화서문, 그리고 팔달문에서 실명판을 볼 수 있는데 화서문 것은 마모가 심해서 눈을 씻고 들여다 봐야 볼 수 있지만, 창룡문과 팔달문의 실명판은 선명하게 보인다. 그중에서 팔달문 것은 마치 어제 새긴 듯 글씨가 살아 있다. 최근에 일어난 부실 공사들과 비교해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자신이 없으면 기록을 제대로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화성의 건설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곧, 정조를 비롯한 당시 정치가들의 자신감 있는 국정 수행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면 그 당당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는 당연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으로 깔려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꼼꼼한 성역 관리와 공사 경영

화성의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관리와 경영의 능력이다. 오백 칸이 넘는 행궁을 건설하면서 십리에 이르는 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더구나 28개월 만에 마무리 지었다는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국왕의 명령이 아무리 지엄하다 해도 공사를 수행할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당대의 기술력과 관리. 경영 능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금전 관리를 엄격히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당으로 인건비를 주는 경우와 일의 성과에 의해 돈을 주는 성과급제를 병행하였다. 혹시라도 빈틈으로 경비가 빠져나가는 것을 예방하고 작업을 독려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욕심이 배제된 경영과 관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하게 취급된다. 또 개인의 욕심이 끼어 들 틈이 보이는 것은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깨끗한 경영과 엄격한 관리로 쌓았기 때문에 화성은 짧은 시간에 완벽하게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곽의 꽃, 조선의 꽃

화성은 조선의 절정기에 탄생한다. 그 시작은 비운에 죽은 사도세자의 묘원을 옮기는 것으로 비롯되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세계인이 즐겨 찾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발전, 심화, 절정, 쇠퇴라는 곡선을 그리면서 역사는 흐른다. 화성의 건설 이후로 보이는 조선의 정치적 문화적 쇠퇴는, 거꾸로 화성을 극점에 올려놓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그래서 화성은 조선의 꽃이요, 우리나라 성곽의 꽃이다.
그러나 꽃이 아무리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해도 제대로 가꾸고 보살피지 않으면 시들거나 죽어버린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그래서 자명해진다. 이 아름다운 화성을 어떻게 가꾸고 지킬 것인가. 화성에 서려 있는 소중한 정신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교훈으로 만들 것인가.
화성을 건설한 사람들도 훌륭했지만 그것을 잘 지키고 가꾼 오늘날의 우리들도 훌륭했다고, 이백년 후의 후손들이 우리를 평가할 수 있도록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글. 염상균>
 
 
[5]정조대왕의 수원사랑
지난번에 쓴 '왜 화성을 쌓았을까' 편에서도 언급 됐지만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그리고 정조대왕은 수원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지난 번 글을 쓰고 난 뒤 수원시 학예연구사 이달호 씨는 위에 열거한 이유 외에도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가 배봉산에 위치해 있었을 때 정조의 5 세 된 왕세자가 돌림병으로 죽어 후사(後嗣)가 끊겼고, 곧이어 잉태 중이던 세자의 어머니마저 비명에 간 비극을 겪었으나 △현재의 위치인 화산으로 이 장하고 난 뒤 국가 최대의 경사인 왕손(후에 순조)을 낳았다는 것을 수원 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의 요인으로 들었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최근 '조선 후기 향토사회연구'와 '조선시대 지방사 연구'라는 역작 두권 을 한꺼번에 펴낸 최홍규 교수(경기대 사학과)의 전기한 저서에 따르면 정조는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지세(地稅)와 부역을 감면해 줬으며, 환 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문·무과 별도 과거를 통한 지역 인재 등 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특별과거인 별시는 정조대왕의 능행차 때마다 실시됐는데 수원과 인근의 유생, 한량, 군인, 무사 등이 응시하도록 특별 배려했다.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열렸던 해의 능행차 때에는 임 금이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실시, 문과 5인, 무과 56인의 급제자를 선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1790년(정조 14)에 실시한 과거 때는 합격된 사람들 중 3명이 수원 호적자가 아님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고, 이들을 징벌 해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이 있었으나, 정조대왕은 합격만 취소 시키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일도 있었다. 
최홍규 교수에 따르면 "수원과 인근 지역민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매년 실시 되는 이 문·무과 특별 과거시험을 통해 관계(官界)와 군(軍)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고장 백성들은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 과정을 통해 사회적 신 분 상승의 기회도 그만큼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시를 이전하고 행궁 등 관아 건물을 지을 때, 또 화성을 축성할 때 예전 과는 달리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꾼을 모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예전에는 강제 징발된 부역군들이 공사를 맡았었다. 
조정 대신들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 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했다. 

그 결과 수원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을 차질 없이 진행 할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정조대왕은 행정·군사·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춘 수원을 건설하기 위해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꾸어주면서 공업과 상업 을 촉진, 18세기 말 대도회·상업 도시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 를 마련했다. 
이때 수원의 제지 수공업 발전을 위해 4천냥의 금융지원을 통해 북부면 지소동(현재 장안구 연무동)에 제지공장을 차렸으며, 팔달구 우만동 봉녕사 는 두부제조를 전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장은 팔달문 밖의 남시장(일명 성밖시장, 현 영동시장)과 북수동의 북시장(일명 성안시장)이 섰다. 
이렇듯 정조대왕의 애정과 특혜 덕분에 수원에는 많은 외지인들이 이주를 해오는데 특히 해남에 거주하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수원으로 이사를 해와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정조실록의 기록도 있다. 

당시 북부 보시동(현 북수동)에 형성된 8부자집은 전국에서 이주해 온 상공업자들이 상업활동을 벌인 곳이라고 최교수는 주장한다. 
이때 서민과 소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해 줬다고 해서 보시동(普施洞)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정조대왕이 상공업에만 신경을 썼던 것은 아니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둔전을 일굼으로써 오늘날 수원이 농업과학 교육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정조대왕의 수원사랑은 이렇듯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쳤다. <김우영 주간> 
 
 
 
 
[6]정조대왕은 어떤 분인가요?
조선의 제22대 왕.
호 : 홍재
본명 : 산
별칭 : 자 형운
활동분야 : 정치
주요저서 : 《홍재전서》

이름 산.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국왕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였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으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소생으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되었다. 
홍인한은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시강원(侍講院)의 궁료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리청정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리청정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賜死)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明義錄)》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奎章閣) 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宙合樓)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세손 때부터 시강원 열서(說書)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元嬪)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각신(閣臣)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抄啓文臣) 강제(講製)도 주관하였다. 
이 제도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으로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갔다.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하였다.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宣傳官) 강시(講試)제도도 함께 시행하여 1783년의 장용위(壯勇衛), 1791년의 장용영(壯勇營) 등 친위군영 창설,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

정조는 숙종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784년에 지은 《황극편(皇極編)》을 통해 주자 ·율곡의 시대에는 붕당정치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을 구분하여 전자가 우세한 정치를 꾀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각 붕당 안에 군자 ·소인이 뒤섞여 오히려 붕당을 깨서 군자들을 당에서 끌어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는 신하로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논파하였으며, 편전의 이름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하여 이를 실현시킬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고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그는 만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 되기 위해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上言) ·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일성록(日省錄)》과 실록에 실린 상언 ·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 
재위 13년째인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園所)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수원도호부 자리에 새 원소를 만들어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수원부는 화성(華城)을 새로 쌓아 옮기고,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만들었는데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재위 9년에 경강(京江), 즉 한강의 상인들 소유의 배를 편대하여 각 창(倉)별로 분속시켰는데 14년에 주교사(舟橋司)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정조는 재위 2년째인 1777년에 대고(大誥)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民産) ·인재(人才) ·융정(戎政) ·재용(財用)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했다.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民隱),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殿宮)의 공선정례(貢膳定例)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2년에는 내수사(內需司-도망친 노비를 잡아들이고 벌주는 관직)를 혁파하였다. 
이렇게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인 다음에 감사 ·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하였다. 심지어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었다.

민산의 대본인 농업 발전을 위해 여러 차례 응지(應旨) 상소의 기회를 만들고 생산력 증대에 관한 많은 의견들을 수렴해 보급에 힘썼다. 
측우기와 점풍간(占風竿)을 설치하여 세정의 합리화를 꾀했으며 진휼을 위해 여러 차례 내탕(內帑)을 출연했다. 1782년에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千歲曆)을 미리 편찬 ·간행하게 했다. 
민산은 경계(經界)에서 비롯한다는 견지에서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나 치세 중에는 실현을 보지 못했다.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1791년에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

백성들이 부당한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조 때 시작된 형정의 쇄신을 계승하여 재위 2년째에 형방승지를 의금부 형조 등에 급파하여 기준을 어긴 형구(刑具)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하고, 그 기준을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어 각도에 배포하였다. 

책에 실은 자의 길이와 같은 유척(鍮尺)을 만들어 함께 보내면서 준수를 엄명하고 어사들로 하여금 이를 자주 확인하게 하였다. 
재위 7년부터는 의금부와 형조 등의 결옥안(決獄案)을 초록하여 매월 말에 보고하게 하고, 4분기마다 책자를 만들어 왕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사형수의 결옥안은 밤을 새워가면서 10번이나 확인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힘썼다. 
그 심의 기록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자로 전한다. 9년째 되던 해에는 역대 법전들을 모아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치의 기반을 다졌다.

인재의 양성을 위해서는 초계문신 문강(文講), 선전관 무강(武講) 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성균관 월과(月課:월별 수강과목 지정)제도를 시행하고, 유생들이 관내에 상주하면서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사찰 승려들의 회식제도를 도입하여 식당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으며, 만년에는 각도에서 행해지는 소과(小科:흔히 道科라고 불렸다)도 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賓興科)로 이름을 고쳐 시행했다. 
빈흥과는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이것을 규장각신이 가지고 현지에 내려가 과장에서 개봉 ·게시하고 답안지를 거두어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국왕의 주관 아래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각 지역별 성과를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한성부, 1792)〉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영남, 93)〉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강원도, 1794)〉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제주도, 1795)〉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함흥, 1795)〉 〈관북관서빈흥록(關北關西賓興錄:함경 ·평안도, 1800)〉 등으로 각각 간행하여 도과(道科:소과의 별칭)의 새로운 전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무과에서도 몇 차례의 경과(慶科)를 통해 다수의 출신(出身)들을 배출하면서 《병학통(兵學通, 9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4년)》 등 정예병 양성에 필요한 병서들을 편찬하여 보급했다. 융정으로는 기존 5군영보다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하고 서해의 해방(海防)을 위해 교동의 통어영(統禦營)과 강화도 경영에 힘썼다.

재용면에서는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 양곡수를 조사하여 《곡부합록(穀簿合錄)》, 환곡행정의 전국적 현황을 조사하여 《곡총편고(穀總便考)》, 전세 징수의 기본상황을 파악하여 《탁지전부고(度支田賦考)》를 각각 편찬하여 재정의 혁신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실제로 각 관서간의 급대(給代) 관계의 개선을 통해 각 계층의 부당한 부담들이 경감되는 추세를 보였다.

재위 중에 치세의 방향 모색과 관련하여 규장각을 통해 어정(御定) ·어명(御命)으로 저술사업을 벌여 근 150종의 신저술들이 이루어졌다. 
문장에 관한 것으로 《사원영화(詞苑英華)》 《시악화성(詩樂和聲)》 《팔자백선(八子百選)》 등 다수, 경학에 관한 것으로 《경서정문(經書正文)》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 등, 사서로 《송사전(宋史筌:72)》 《사기영선(史記英選:95)》 등, 유가서로 《주서백선(朱書百選)》, 불서로 《범우고(梵宇考)》, 지리서로 《도리총고(道里摠攷)》, 축성서로 《성제도설(城制圖設)》, 왕조의 의례관계로 《속오례의(續五禮儀)》 등 수다한 저술이 이루어졌다.

선왕 영조 때 한국의 제도문물의 내력을 쉽게 알아보기 위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를 크게 증보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를 만들고, 1782년에는 역대 선왕들의 치적을 담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완하였다. 
보감은 세조 때 태조 ·태종 ·세종 ·문종 4조의 것을 편찬한 이후 숙종 때 《선조보감》, 영조 때 《숙묘보감》을 편찬하는 데 그쳐 그 사이에 12조의 보감이 궐문이었는데 이를 보충하고 《영조보감》을 새로 만들어 합쳐 1768권으로 완성시켰다. 1784년에는 보감을 종류별로 재편집하여 《갱장록》이라고 하였다. 
1781년에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왕실의 의궤들의 원본을 안치하여 영구보전을 꾀하였다.

비단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치적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 ·기자 ·삼국 ·고려의 시조 등의 왕릉을 수리하고 수로왕릉과 신라의 제 왕릉에 두루 제사지냈으며, 삼성사(三聖祠) 제의를 바로하고, 온조왕묘를 숭열전(崇烈殿)으로 이름붙이고, 고려 4태사묘에 사액하였다. 

외적 격퇴에 공이 큰 인물들의 전기 편찬에도 힘써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비롯해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 《임충민실기(林忠愍實記)》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왕조 전기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로 편찬 간행하고 향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의례들을 종합 정리하여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펴내게 했다.

이 많은 저술들의 출판을 위해 임진자(壬辰字) ·정유자(丁酉字) ·한구자(韓構字) ·생생자(生生字:목활자) ·정리자(整理字) ·춘추관자(春秋館字:철자) 등 여러 가지 자체의 활자를 80여 만 자 이상 만들었다. 
그러나 재위 중에 활자로 간행을 한 것은 전체 신저술 중 1/3 정도였으며 순조 연간에 어느 정도 간행이 후속되었으나 현재 대부분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근신인 규장각 각신들로 하여금 중요 정사를 매일 기록하게 하여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새로운 연대기 작성을 시작했으며, 경연 석상에서 한 말은 참석자들이 기록하여 《일득록(日得錄)》으로 편집되었다.

1791년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 등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제사를 거부하고 가묘의 신주를 불사른 진산(珍山)사건이 발생하여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나, 정학(正學)을 신장하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억제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극형은 윤지충 ·권상연 두 사람에만 한정하고 탄압으로까지 발전시키지 않았다. 

이 때 천주교뿐만 아니라 명나라 말, 청나라 초 패관소품의 학을 속학(俗學)이라 하여 경계의 뜻을 함께 보였는데, 재위 초부터 문체가 날로 흐트러지는 추세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본래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자신의 측근 가운데 천주교에 가까이 간 사람들이 많은 한편, 공격하는 측에 후자의 경향을 띤 자들이 많은 상황을 간파하여 양쪽의 잘못을 지적하여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발전을 다지려는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1795년에 어머니의 회갑연을 아버지의 원소가 있는 화성유수부에서 열어 전국의 노인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다. 즉 이 행사를 기념해 조관(朝官)은 70세 이상, 일반 사서(士庶)는 80세 이상, 80세 전이라도 해로한 자 등에게 1계를 가자(加資)하여 모두 75,145인이 혜택을 보았는데 《인서록(人瑞錄)》이라는 책으로 이 사실의 자세한 내용을 남겼다. 

1793년의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정례(園行定例)를 저술하게 하여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정례화하고, 1795년 잔치의 모든 사실은 《정리의궤통편(整理儀軌通編)》으로 남겼다. 
재위 10년째에 효의왕후 몸에서 난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24년째 정월에 수빈(綏嬪) 박씨 몸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재위 18년째인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1800년 6월 28일에 49세로 일생을 마쳤다.

타계하기 한 해 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겼고 자신의 저술 ·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된 것을 보았으며, 1814년에 순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이를 간행하였다.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시호를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고 하였으며,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1900년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화성연구회 제공>
등록일 : 2008-01-03

0

펼치기댓글(0) 펼치기스크랩(0)

확장하기


다음글 화성의 특징1 ,2,3,4,5,6 전체글 보기
이전글 정조대왕(상) (중) (하)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