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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건국 60주년 경기도 발자취 |* 경기도

2008-08-1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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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건국 60주년 경기도 발자취
건국-민주화-경제발전의 ‘큰 축’ 역할
[경기일보 2008-8-15]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인 2008년 8월15일. 지난 1948년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이후 60년간 모진 풍파와 탄압을 견디며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자랑스런 역사였다. 본보는 그 뜨겁고 숨가빴던 60년의 역사 속에서 현대사의 한 축을 떠받친 경기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 해방 이후 경기도내 건국활동
건국활동의 첫 걸음은 해방 이후 경기도내 곳곳에서 일어났다.
수원과 용인, 평택, 시흥, 포천 등지에서는 자발적인 조직과 더불어 인민위원회가 주도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원을 비롯한 인근 군 지역의 인민위원회는 군 청사를 접수하고 대다수 면사무소에는 그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어 1946년 11월에는 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이 합당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이 결성됐고, 경기도 전역에서 군당은 물론 면 단위와 동·리까지 남로당 지부가 등장했다. 미군정 아래에 있던 당시 경기도의 지방정치는 중앙정치 형태의 복사판이었다.
경기도는 이때만해도 서울을 포함하고 있었고 중앙정치가 전반적인 정국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미군정이나 국내 정치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과 가까웠던 인천은 노동운동이 활발했고, 수원과 양평, 강화, 평택 등지에선 농민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이런 가운데 양평의 여운형과 인천의 조봉암 등 경기도를 대표하는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다수 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한 뒤부터 도내 대다수 인민위원회들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중앙집권적인 서울의 막강한 경찰력이 지방 인민위원회를 제압하면서 당시 한민당의 주요 지도자들이던 장택상이 수도청 A국(서울 및 경기도 담당) 경찰국장에 임명되고 구자옥이 경기도 초대 도지사에 부임, 통치기구가 정비되기에 이른다.
한편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경기도내 좌우익의 대립은 격해졌고 1946년 9월 총파업을 비롯해 평택군 송탄면 가재리와 팽선면 계양리, 되박산 등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또 파주에서는 폭동이 사전에 탐지되면서 42명이 체포되는 등 이듬해 여름에는 각지에서 하곡수매 거부운동이 일어났다.
1948년 5·10선거가 치러진 뒤 경기도내에서는 총 29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됐고, 곧바로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게 됐다.
주한미군과 잠정적 군사행정협의를 체결한 정부는 11월18일 공포된 대통령령에 따라 서울에 포함돼 있던 경기도의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이후 남북이 서로를 부정하며 38선 충돌이 잦았던 경기도 전역에 차츰 전쟁위기가 엄습해 오면서 일대 격동이 벌어지게 된다.
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정진각 상임위원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경기도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며 “하지만 1945년~1948년 사이의 경기도 주요 자료가 폐기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 한국전쟁과 경기도, 그리고 4·19 혁명
1950년 6월25일 새벽 옹진반도에 총성이 울렸다.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은 경기도에 엄청난 피해를 몰고 왔다. 당시 도내에서만 무려 12만8천740명이 숨졌고 국내 최대 경공업지대였던 경인공업지역은 완전히 파괴돼 이 일대 경제 또한 순식간에 붕괴됐다.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점은 북한 인민군의 주공격선이 모두 경기도를 관통하면서 대규모의 양민학살이 자행됐다는 것이다.
양주군 남면 남양 홍씨촌 집단학살과 파주군 임진면 임진강 갑바위 집단학살, 강화군 하점면 강영뫼 학살 등 인민군과 좌익세력의 학살사건에 이어 파주군 산남리·문발리, 고양군 탄현리·구산리 등에서는 우익세력에 의한 보복 학살도 일어났다.
무분별한 이념적 대립과 연쇄보복이 몰고 온 비극으로 50년대 경기도는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는 이승만 독재정권이 자행한 3·15 부정선거 이후 4·19혁명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3·15 부정선거 직전인 1960년 3월10일 낮 12시30분 수원 북문에서는 200여명의 수원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고, 19일에는 인천공업고 학생 300여명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감행했다.
4월20일 또다시 수원 서울대 농과대학 학생 600여명과 인천사범학교 학생 300여명이 동시 다발적인 민주화 운동을 벌이면서 독재정권 타도를 부르짖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퇴진하면서 같은해 12월26일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경기도의회는 전체 46명 가운데 민주당이 21명, 무소속 14명, 신민당 11명이 당선됐다.
또한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출신(제8대 신광균 지사)이 뽑히는 등 2번에 걸쳐 치러진 선거에서 경기도의 경우, 민주당이 의석의 절반을 차지하며 민주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분열과 파쟁을 거듭했고, 급기야 1961년 5월16일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쿠테타가 발생, 암울한 군사정권의 시대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수원시 문화관광과 이달호 문학박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수많은 문화유산이 훼손됐다”며 “지금이야말로 피와 땀이 서린 경기도의 역사를 재조명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황신섭기자 hss@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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