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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기독교 - 지동성당 |* 경기도

2008-01-2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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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기독교 - 지동성당
  지동성당 25주년을 맞아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는 "신자 670명으로 북수동에서 분리된 1970년 당시의 모습에서 25년이 지난 지금의 성숙되어 가는 지동 본당을 보면 주님의 손길과 도우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면서 "당시 지동은 수원 시내에서 멀리 벗어난 외곽지역으로 교도소를 인접하고 있었으며 6.25 전쟁의 피난민들과 가난한 농민들만이 살아가던 영세지역이었던 열악한 환경은 오히려 더욱 깊은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했고, 지역 주민들의 가난 극복과 일치를 위해 수원교구에서는 처음으로 신협제도를 도입, 창설하기도 했습니다"라고 전했다.
 <1995년 11월 26일 지동성당 25년사 중에서>
 
 수원시 팔달구 지동 76-1 소재한 '지동성당'(초대 주임 공곤라도 신부 Konrad Fisher)은 '북수동성당'에서 분리, 1970년 6월 29일 건립됐다. 
 지동성당의 발자취는 1967년 6월 수원시 지동 93번지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지역주민들의 의료혜택 주기 위해 개원한 '성 빈센트 병원'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 때 지역 사목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지동성당이 태동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상처로 원주민과 피난민이 모여 살던 낙후된 동수원 지역에의  '성빈센트 병원' 개원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가져 왔다. 이에 교구적인 차원에서 전교와 사목 방침의 개편된 것이다. 당시 교구장 윤공희 주교는 독일 레겐스브룩(Regensbrug) 교구에서 한국에 파견된 공곤라도(Konrad Fisher) 신부를 성 빈센트 병원의 원목 신부로 임명했고, 훗날  '지동성당'의 초대 주임신부가 된다.
 성당이 위치한 지동은 옛 부터 수원 지역의 외곽에 소재한 한적한 곳으로 주로 논, 밭과 과수원 등 농사가 주업인 원주민과 한국전쟁 이후부터 몰려든 피난민들로 구성된 집단 빈민 지역으로 통했다. 이들 중 530여 명(행불자 380명)의 신자들을 곽병운 구역 회장이 관리했다.
 성당 건립을 추진하던 공 신부는 병원 원목 신부로 재직하면서 서강대학교 유지 재단인 예수회 도움을 받아서 상당 부분의 성당 부지 매입 기금을 형성했다. 1967년 10월 30일 지동 28-1번지 소재 대지 440평을 매입했고, 12월 30일에는 성당 부지(76-1, 76-2) 480평을 공 신부의 사재를 털어 구입, 1968년 5월 7일 재단법인 천주교 수원교구 유지재단으로 등기를 마쳤다.
 이 후, 1967년 10월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기증한 대지(지동 94-4) 위에 사제관을 건립, 1968년 8월 30평 규모의 강당을 신축하여 '지동성당'이 창설 된 것이다.
 당시 수원교구장이었던 윤공희 주교는 1970년 6월 29일 '북수동본당'(주임 류봉구 신부)에서 '지동본당'을 분리 설정하고 초대 주임신부에 공 신부를 임명했다. 본당 설정 당시 관할 구역은 수원시 지동과 인계동 일부와 매탄동 , 원천동, 우만동, 용인군, 기흥면, 영덕리, 신갈 등으로 신자수 총 670명이었다.
 '지동성당'을 설립한 공 신부는 1934년 11월 26일 독일에서 출생하여 1960년 6월 29일 서품을 받고 4년 후인 1964년, 입국한 선교사였다. 레겐스브륵(Regensbrug) 소속 교구의 사제인 공 신부는 처음에 부산에 입국하여 부산교구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이 후 수원에 입성하여 성 빈센트 병원 원목신부로 사역하면서 '지동성당'을 설립한 것이다.
 평소 자신에게 가져오는 선물은 일체 거절하며 불우한 이웃들에게 갖다 줄 것을 당부했던 공 신부. 그에 대하여 '공 신부는 전형적인 독일풍의 인물이어서 독일식의 행동 양식과 태도를 그대로 견지하고 살았다. 그래서 때로는 그의 진취적인 행동이 신자들과의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원만한 협조를 이루었다. 선교사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있던 공 신부는 본당 사목뿐만 아니라 특수 사목에도 열과 성의를 다했다. 한국 구라협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전국의 나환자들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뿐 만 아니라 독일의 각 교구를 다니면서 나환우를 돕기 위해 마련된 재원으로 나환우들의 마을을 다니면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사목'을 구체적으로 실현했다.
 한편 '지동성당'의 주보성인으로 우리나라의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인 최경환 성인을 정하고 있다. 최경환 성인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 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다가 발각되어 포도청에 끌려가 모진 형벌과 고문을 당했는데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거룩한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며 장렬히 순교했다. 이 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주보 최경환 성인이 순교한 불혹의 나이에 다다른 '지동성당'은 지역 주민들과 더불어  '소외된 이웃을 위한 변치 않는 젊은 사목'을 하고 있다.      
 
게재일 : 200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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