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자형 침체 가능성…불황과 장기전 대비

◆ 한국경제 장기불황으로 가나 ◆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한국 경제의 장기 불황 가능성을 처음으로 공식 언급했다. 기존에 V자형 경기 반등을 예상했던 기업과 가계, 정부가 함께 장기 불황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경기가 크게 하강하고 다시 빠른 속도로 반등하는 V자형 회복 기조에서는 현재 불황을 잠시만 참고 견디면 됐다. 선제적인 '몸집 줄이기'보다는 핵심 인력과 사업 역량을 유지하면서 재도약 기회를 보는 게 현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기가 U자형 혹은 L자형 장기 불황에 빠진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버티기에서 벗어나 중장기적인 살아남기로 전략 수정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한국은행을 비롯한 국내외 예측기관들의 가장 큰 고민은 우리 경제의 저점을 예측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우리 경기를 이끌었던 수출은 세계 경기 침체로 해외 수요가 줄면서 지난해 11월 이후 두 자릿수 감소로 반전했다. 올해 들어서도 1월과 2월 평균 25.6%의 큰 폭 감소세를 기록 중이다.

글로벌 수요 위축이 현실화되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출주도형 경제가 전 세계적으로 경착륙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

한은 이 총재는 12일 우리 경제의 장기 침체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세계 경제가 지난해부터 전체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세계 경기 침체가 장기화된다면 우리도 그러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사라지면서 이에 따른 재고 조정이 불가피하고 이는 결국 추가적인 생산조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실제로 지난 1월 광공업 생산지수는 93.7로, 1년 전과 비교해 25.6%나 줄어 3개월 연속 최저치를 기록했다.

제조업 평균가동률도 61.5%에 그쳐 28년여 만에 가장 낮았다.

가동률이 하락하고 설비투자 수요가 급감할 경우 추가적인 성장률 조정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올해 우리 경제 성장률을 마이너스 2%로 보고 V자형 반등을 예상했지만 아시아 지역의 경기 하강이 올해 초부터 시작됐음을 감안하면 성장률의 추가 하락도 가능한 상황이 됐다.


경기 하강 폭이 깊어지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침체가 장기화되는 것이다. 경기곡선이 V자형에서 U자 혹은 L자로 변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회복 시점이 불투명해졌다는 얘기다. 수출만큼이나 내수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국내 소비와 투자 등이 위축되면서 고용이 급감하고 실질소득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소비의 원천이 되는 가계의 명목임금소득 증가율은 지난해 4분기 -1.7%를 기록했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한 실질임금상승률도 지난해 3분기 이후 감소 폭이 확대되고 있다. 최근에는 환율까지 급등하면서 물가상승 압력까지 더해진 상황이다.

가계의 소비여력을 크게 악화시키는 또 다른 요인은 대출이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꾸준히 내리면서 가계의 원리금 상환 부담은 지난해보다 덜해지고 있지만 가계신용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가계신용잔액은 2008년 말 기준 688조원 규모로 이자 상환 부담만 50조원에 달하고 있기 때문. 정부는 적극적인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 등으로 투자를 촉진한다는 계획이지만 부동산 가격 하락, 미분양주택 수 증가 등 민간 건설경기 침체가 여전히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김재천 한국은행 조사국 국장은 "경기 저점이 다가온다고 해도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장기 불황을 피하기 위해 정부의 지출을 민간부문의 투자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