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당당한부자]⑬ 스웨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발렌베리家’
'부모의 도움없이 명문대를 졸업할 것, 혼자서 해외유학을 마칠 것, 해군장교로 복무할 것, 먼저 조그만 기업에서라도 명확한 경영성과를 보일 것….'
스웨덴 최대의 재력가 집인안 발렌베리가문을 이끄는 수장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와 스웨덴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하는 발렌베리 가문의 수장이라면 어려움을 이겨낸 강인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벼랑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린 뒤 걸어 올라온 강한 새끼만 키우는 사자의 교육과 비슷하다.
발렌베리 가문의 기업들 가운데 통신장비업체 에릭슨, 발전설비업체 ABB,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제지업체 스토라엔소, 베어링업체 SKF 등 무려 5개 기업이 각각 해당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발렌베리가 사람들은 가문의 부를 누리기보다는 이를 잘 관리하고 키우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생각한다. 때문에 자녀를 CEO에 앉히기 전에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 가문은 5대째 일관된 자녀교육론을 실천해 오고 있다.
발렌베리가문은 지난 2003년 ‘삼성의 벤치마크’기업으로 알려지면서 국내에서 유명해지도 했다. 150년에 걸쳐 5대째 세습경영을 하고 있지만 스웨덴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발렌베리가의 가정 교육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 생활은 평민처럼, 기부는 귀족처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동북쪽으로 10여Km 떨어진 요스홀름이라는 작은 마을. 잔잔하게 흐르는 발트해 주변으로 단독 주택들이 그림처럼 놓여 있다. 이 중에 발렌베리가의 5대째 후계인인 야콥발렌베리 회장의 집이 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의 집은 주변의 다른 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담장도 훌쩍 뛰면 넘어갈 정도로 야트막하다. 마치 성처럼 높은 담장을 두르고 있는 우리 재벌가들의 집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초라해 보일 정도다.
통역의 설명이 이어진다. "스웨덴에서는 작은 섬에 집을 짓고 요트 선착장을 갖추고 해야 좋은 집이라고 해요. 이 정도는 평범한 수준이라고 보면 돼요. 집값도 원화로 하면 6억~7억원 정도고요"
'강남 아파트 한 채 값도 안되는 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나마 특징이 있다면 집 정원에 있는 커다란 까만색 소 모양의 조형물. 암예방을 위해 연구기금을 모금했고, 사람들은 이 조형물을 사는 형식으로 기부를 한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사랑의 열매쯤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조형물은 손가락만한 것부터 실제 소만한 것까지 크기가 다양하다. 크기가 클수록 기부액이 크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야콥 발렌베리의 생활은 이곳 마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을회의도 참석하고 학부형회의에도 나간다. 야콥의 아이들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설명이다. 생활은 ‘일반인’처럼 기부는 ‘귀족’처럼 하는 셈이다.
◇ ‘엄정한 규칙’…가문을 이어간다= 부모들은 자녀의 거울이며 역할모델을 한다. 자신의 부모를 보고 배운대로 행동하고 그대로 자녀에게 물려준다. 발렌베리가도 마찬가지다. 자녀에게 가르친 대로 행동하고 정해진 규칙을 엄정하게 지킨다. 발렌베리가의 CEO가 되기 위해서는 수십년의 세월이 걸린다. 현재 CEO역할을 하고 있는 야콥발렌베리는 50세가 되어서야 경영권을 이어 받았다. 30세대만 되면 경영권 승계작업을 벌이는 국내 기업들과는 다르다. 왜 그랬을까? 철저한 검증절차를 거치기 때문이다.
우선, 발렌베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기업에서 경영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발렌베리가문을 연구하고 있는 롤프 칼슨 액티브오너파트너스 회장은 “철저하게 능력있는 CEO가 되는 것이 발렌베리의 CEO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무조건 장자가 경영권을 상속받는 사례는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선대 경영자들은 그룹의 경영을 맡는 후대에게 경영에 실패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넘기겠다는 ‘경고’를 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예비 경영자들은 자연히 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강력한 규칙 탓일까? 발렌베리가에도 아픔은 있다. 4세대 발렌베리가의 장자였던 마르크스 발렌베리.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한 후 뉴욕과 런던, 파리, 제네바의 국제적인 금융회사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결국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자살을 택했다. 결국, 발렌베리가의 경영권은 동생인 피터 발렌베리에게 넘어갔다.
이러한 까닭에 발렌베리의 경영자들 중에는 이복 형제들도 있고 사촌들도 있다. 한편, 발렌베리가는 철저하게 ‘복수경영제’를 도입하고 있다. 아무리 유능한 경영자라도 독단적인 경영으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최소화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해군사관학교를 가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규칙이다. 창업주에서 5대까지 이어져 오는 10명의 경영자 중 해군사관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은 5세대의 막내인 피터 발렌베리 주니어밖에 없다. 그러고서도 그가 발탁된 이유는 미래의 경영자로서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칼슨 회장은 “해군장교를 하면 리더십이 길러진다”며 “여기에 다양한 해외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해군장교를 시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복무를 통한 사회적인 참여를 중요시한다”며 “이같은 태도를 스웨덴 국민들은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해외유학을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것도 경영능력을 판단하는 요소다. 특히, 외국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영어는 기본이고 몇 개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슨씨는 “발렌베가가는 오래전부터 국제적인 기업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며 “언어 장벽이 존재할 경우 원활한 경영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외국어 구사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대물림 = 발렌베리가문이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마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가풍 때문이다. 발렌베리는 공익재단을 통한 적극적인 사회환원으로 스웨덴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칼슨씨는 “발렌베리가문은 아무리 성공한 집안이라도 사회의 한 구성원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며 “성공한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발렌베리재단은 수익의 대부분을 스웨덴의 과학ㆍ기술 발전을 위한 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발렌베리 기업집단의 경영성과가 자연스럽게 스웨덴 사회 전체로 환원되는 ‘선순환’을 창출해내는 고리 역할을 해 왔다.
발렌베리그룹 오너 재산은 그리많지 않다. 인베스터의 명예회장과 회장인 피터, 야콥의 재산은 각각 199억원, 52억원(2005년 기준)에 불과하다. 비상장사의 상장 등을 통해 1조원이상의 부를 축적한 삼성, 현대자동차, 롯데 등 한국 재벌 2세들의 재산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발렌베리 소유기업들의 경영수익금은 배당을 통해 지주회사인 인베스터를 거쳐 크누트앤앨리스발렌베리재단, 마리앤느앤마쿠스발렌베리재단, 마쿠스앤아말리아발렌베리추모재단 등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발렌베리가의 수익은 인베스터의 주요 주주인 이들 재단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구조를 갖고 있다.
칼슨 교수는 "발렌베리가문이 부의 사회환원과 왕성한 사회공익사업, 후계자들의 군입대 등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며 "엄격한 규칙을 유지한다면 이러한 앞으로도 존경받는 가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명문가 발렌베리는 어떻게 경영되나?
발렌베리의 계열사는 14개. 이들 각 계열사는 각각 독립기업으로 운영된다. 국내 대기업들처럼 계열사라는 동질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통일된 브랜드나 상징물도 없으며 발렌베리라는 말이 들어간 회사도 단 한개도 없다. 지주회사인 인베스터가 각 자회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을 뿐 국내 대기업과 같은 순환출자는 없다.
발렌베리는 ‘투 톱’의 오너경영자와 경륜 있는 전문경영인들이 각 계열사 이사회에 교차 참여하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현 투 톱 경영자 중 한 명인 마쿠스 발렌베리는 SEB 회장과 에릭슨, 사브 부회장을 맡으면서 아스트라제네카와 스토라엔소 이사를 겸임하고 있다. 다른 한 축인 야콥 발렌베리는 인베스터 회장과 SEB와 SAS의 부회장, ABB 이사를 맡고 있다.
발렌베리가 이처럼 투 톱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독단으로 흐를 수 있는 오너경영의 단점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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