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열장 너머 멋진 가죽옷을 입은 마네킹 옆에서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김영수 사장이 보인다. 그는 예순 명 남짓한 직원과 함께 해마다 150억 원 매출을 올리는 법인체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이다. 김 사장은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인데도 일본어와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고, 재산도 80억 원이 넘는다.

김 사장은, 이북에서 결혼했다가 전쟁 중에 홀로 남하한 아버지와, 결혼한 지 열흘 만에 남편이 전쟁터로 가 전사하여 홀로 남게 되어 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 밑에서 동생 넷과 함께 충청도 시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아버지가 폐결핵을 앓게 되었는데, 그때만 해도 결핵은 아주 중병이라서 죽는 확률이 더 높았고, 치료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제 가족은 뿔뿔이 헤어져야 했다. 어머니 혼자서 다섯 아이를 건사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혼자서 먹고살 수 있어 취직하기로 하였고, 바로 밑의 여동생은 아직 졸업 전이지만 식모살이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라서 학교를 그만두고 식모로 가기로 하였으며, 나머지 아직 어린 세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가 아시는 분이 사는 곳으로 가서 살기로 했다. 하여 재산을 정리하려고 보니, 남은 것은 소 한 마리였다.

경기도 송탄에서 고가구 점원이 되다

7만 원을 받고 소를 판 어머니는 달랑 차비만을 손에 쥐어 주시고 각자의 길을 재촉했다. 김 사장은 송탄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미군을 상대로 고가구를 파는 가게의 심부름꾼으로 취직했다. 그때는 밥을 먹여 주고 잠만 재워 주면 월급이야 있든 없든 고마워했던 시절이다. 아침 9시부터 일하고 밤 10시가 되어야 가게가 끝이 나는데, 마음대로 쉴 수도 없었다. 가게 청소하고 가구 손질하고 정리하다 보면 새벽 1~2시는 보통이다. 그러나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었으니 김 사장은 말 그대로 뼈 빠지게 일했다.

불평불만 없고, 휴일이고 밤이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는 김 사장을 보고 고가구점 주인은 "네가 스무 살이 되면 점포 하나 떼어 줄 테니 열심히 하거라" 말했고, 이를 굳게 믿고 김 사장은 말 그대로 월급 한 푼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그저 일만 열심히 했다. 그런데 가게를 하나 떼어 주겠다던 고가구점 주인이 갑자기 가게를 정리하더니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했던가, 그동안의 고생이 말짱 헛고생이 되자, 세상의 쓴맛을 알게 된 김 사장은 이때부터 살겠다는 의지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사라지자, 난감한 김 사장은 이곳저곳 일할 곳을 알아보았다. 마침 평소 김 사장이 성실하고 근면하다고 생각한, 가죽옷 만들고 소매업도 함께 하는 사람이 옷 공장에서 일해 보겠느냐고 제의해 드디어 지금 김 사장이 하고 있는 의류 계통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옷 공장은 생각과는 달리 고가구점보다 더 힘들었다. 늘 기름칠해야 하고 메고 지고 날라야 하는, 그야말로 막노동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김 사장은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옷을 갖다주라는 주인 심부름 때문에 한 옷가게에 들렀는데, 그곳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점원의 옷은 깨끗하고, 일하는 환경도 좋고, 힘든 일은 하지 않아도 되고, 돈도 더 많이 벌고…. 김 사장은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어" 하고 혼자만의 다짐을 하고 공장으로 돌아와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영어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판매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아주 좋았다. 미군이 주된 손님이고, 장사하는 사람은 이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를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공장 사람들을 빼고는 주위 사람들은 거의 다 영어를 하기 때문에 쉽게 영어에 다가갈 수 있었다. 한 해쯤 되어 영어로 물건을 팔 수 있을 만큼 되자, 주인에게 찾아가 자신을 판매직으로 옮겨 줄 것을 요청했고, 주인의 시험에 합격하여 꿈에 그리던 판매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난은 내 대에서 끝내고 절대 물려 줄 수 없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김 사장은 생각이 많아졌다. 자신을 바라보면, 촌놈에 배운 것 하나 없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없으며, 든든한 뒷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앞날이 깜깜하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동생들도 부담스러워지고, 방황도 많이 했다. 자포자기 끝에 막살아 볼까 생각도 하고, 양아치가 되어 볼까, 미국으로 도망칠까 생각도 했다.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와 보면 달랑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마저 등 돌리고 싶어졌다.

이렇듯 시련과 아픔을 겪다가, 나이 스물이 되어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이 모든 고통이 어차피 주어졌다면 이겨 보자'는 오기로, '부모가 내 버팀목이 못 되었지만 나는 동생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지, 그리고 나는 결코 내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김 사장은 그즈음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경제를 일으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모방하여 스스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다. 1차 계획으로 5년 동안 종자돈을 모으고, 2차 계획으로 서울로 올라가 큰물에서 장사를 배우면서 돈을 더 모아서 11년 되는 해에 가게를 차리기로 했다. 이런 계획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서울 이태원에서 미군과 일본인을 상대로 가죽옷을 생산․판매하는 업체에서 판매원으로 그를 쓰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때(1981년) 월급으로는 꽤 많은 40만 원에 숙식을 제공하고 판매수당까지 준다고 하니 김 사장으로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이태원에 있는 '갑부사'라는 의류점에 판매원으로 취직한 김 사장은, 송탄과는 다른 곳이라는 것을 느끼고 그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앞서가는 판매 전략을 구상했다. 이태원은 관광객 위주로 판매하는 곳이다 보니 관광객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에 앞서 옷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보통 이틀이나 사흘 안에 처리해야 했다. 다른 판매원은 근무 시간에 관광객이 머무는 곳에 찾아가 치수를 재고 시침을 하고 배달을 하였으나, 김 사장은 낮 근무 시간에는 열심히 판매를 하고, 근무가 끝난 9시 이후에 관광객이 머무는 숙소를 방문하여 치수를 재고 시침을 하고 배달을 했다. 그러다 보니 판매 수량이 다른 판매원에 비해 몇 곱절에 이르렀고, 마침내 가게 주인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고, 아울러 두툼한 보너스도 챙기게 되었다.

김 사장은 그전에는 월급을 받으면 거의 다 어머니에게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에 쓰라고 보내주었으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운 뒤에는 독한 마음을 먹고, 어머니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하고 생활비 보내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어머니로서는 힘든 일이겠지만 먼 장래에 내 가게를 갖겠다는 꿈을 이루려면 지금의 아픔이나 고통은 참고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독하게 마음먹고 실천에 옮겼다. 다만, 동생들 학비와 자신의 용돈을 수입의 10퍼센트 내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학비는 계속 지원해 주었다. 그 때문에 자신은 용돈을 쓸 여유가 거의 없었다.

성실은 장사 밑천, 신의는 성공의 씨앗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가게에서 일하고 고객 숙소를 방문하는 일까지 마치면 보통 1시. 김 사장은 송탄에서 미군을 대하던 때와 달리 일본인이 주된 고객이 되다 보니 다시 일본어를 배워야겠다고 판단해, 새벽 7시에 시작하는 종로의 한 어학원에 등록했다. 한겨울에 전날 받아 두었던 찬물에 샤워를 하고 학원으로 가면서 날마다 새로이 다짐을 하고, 배우는 즐거움에 하루를 즐거이 보냈던 기억은 지금도 추억 속에 멋진 모습으로 간직되어 있다.

갑부사에서 6년 동안 판매직으로 일하면서 주로 일본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그들의 사고방식에 공감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신의와 성실이었다. 우리나라도 이 덕목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긴 하지만, 특히 일본인은 신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김 사장은 이런 일본인들과 꾸준히 접촉하면서, 처음과 끝이 늘 같도록 하고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고, 무슨 일이 있을 때는 개인 돈을 털어서라도 고객을 만족시켰다. 그리하여 이들과 지금까지도 인간관계와 사업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신의만큼은 지켜야 하고, 거기에다 성실함을 더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1987년 5월, 김 사장을 옆에서 꾸준하게 지켜보았던 갑부사 주인은 김 사장에게 "내년에 올림픽이 열리면 많은 외국인이 한국을 찾을 것이고, 그때 이태원도 돈 벌 기회가 올 거야. 자네 같은 성실한 젊은 사람도 돈 벌 기회를 가져야지. 내가 가게 하나 봐 둔 게 있으니 이젠 독립하지" 하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김 사장은 기대하던 자신의 가게를 갖게 되었다. 자신이 세웠던 계획보다 4년 앞당겨서 말이다.

가지고 있던 종자돈을 다 모으니 2000만 원, 이 돈을 가지고는 턱도 없이 모자란다. 그러나 가게를 하겠다는 강한 의지 앞에서는 모자란 돈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분을 찾아뵙고 동업을 제의했다. 제안한 내용은 󰡒나는 자신 있으니 한번 믿고 맡겨 봐라󰡓는 식이었다. 김 사장을 평소 좋게 보았던 동업자는 자신에게 불리한 동업 제안에도 흔쾌히 승낙했고, 모두 합해 7000만 원으로 󰡐노스 비치 레더󰡑란 이름으로 가게를 냈다.

매출액 130억 원 되는 법인의 대표이사가 되다

그 뒤로 김 사장은 홀로 사업을 꾸려가고자 동업자를 정리하고, 1991년부터 일본 수출을 준비했다. 기존 고객을 활용하여 일본 업체들을 소개받아 손수 디자인한 옷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여름과 가을이면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게 발벗고 뛰다 보니 제품을 인정받아 제값 받고 어엿하게 수출하게 되었다.

또 수출 길이 열리자 실적을 바탕으로 국내 시장을 공략기로 하고 유명 백화점에 매장을 열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 진출하기가 일본에 수출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러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각오가 단단한 김 사장은 끝내 명동에 있는 제일백화점을 시작으로 신원패션몰, 엠비, 신세계, 현대, 롯데 같은 유명 백화점에 차례로 매장을 열었다.

제품을 성실하게 만드는 정신,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책임진다는 사후관리 덕에 해마다 매출액이 올랐다. 김 사장 자신은 수출에 온 힘을 기울이고, 국내 매장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해 맡기자, 수출과 국내 매장 모두 탄탄해져 지속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김 사장은 "옷이라는 것은 먹고사는 것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판매를 유지하려면 시각적 만족과 감각적 요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매장 인테리어와 질 좋은 상품 개발에 많이 투자해야 한"고 말한다. 또 "옷이란 제조업체와 구매 장소도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에 판매 장소가 백화점 같은 데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렇듯 소비자 심리를 잘 알다 보니 어느새 매출액이 80억 원이 넘어서, 개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드디어 주식회사를 내고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꿈만 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날은 모든 걸 잊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다. 그리고 부모님께 고마워했다. 자신을 강하게 자라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시고 온전한 정신과 육체를 주신 것에 대해.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김 사장은 돈을 아주 많이 벌게 되었다. 일본으로 수출하다 보니 가격은 그대로고 환율은 높아 이익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정적인 회사로서 김 사장 자신이 없어도 잘 운영되도록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있고, 더 벌면 사회와 직원을 위해 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김 사장은 이제 머지않은 마흔다섯에 은퇴하려 한다. 은퇴한 뒤에는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가족은 김 사장에게는 자신을 만들어 준 은인들이란다. 김 사장은 최근 그동안 자신보다 가족을 더 먼저 생각해 자신을 희생한 부인을 위해 3층짜리 건물에 서양음식점을 개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제 부인도 자신의 존재 이유와 자신의 가치를 찾아 멋지게 인생을 마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글_류우홍

열세 해 동안 국세청 조사국에서 일했다. 해박한 세무 지식과 금융 지식으로 국세청과 금융기관에서 세무 관련 전문 강사로 활동했고, 매경TV․와우TV․이코노미스트에서 세금 상담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는 등, 금융가에서 독보적인 세무 전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우리은행 PB사업단 󰡐투 체어스󰡑의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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