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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32)] 수원연화장 건립, 힘들고 어려운 여정속 '영혼의 안 |♣김충영의현미경

2024-02-20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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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32)] 수원연화장 건립, 힘들고 어려운 여정속 '영혼의 안식처'로 거듭나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4.02.19 06:00수정 2024.02.19 07:09

수원시 연화장 전경 항공사진.(사진=진우건축 김동훈 대표)

 

수원시 하동의 화장장 건립은 부지 선정부터 어렵고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다. 이의동(법정동 이의동과 하동)주민들은 즉각 화장장 이전 반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95년 2월 10일 이전부지가 발표되자 닷새 후인 15일 400여 명이 시청 앞 올림픽공원에서 반대 집회를 열었다. 주민들은 도시계획법 절차에 의한 도시계획시설(화장장)이 결정되기 전 화장장 이전부지가 확정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하루 앞서 14일에는 이의동 통·반장 37명이 화장장 이전 예정지 결정에 반발해 사퇴서를 냈다. 이들은 예정지 일대가 1972년부터 원천유원지로 묶여 주민들이 불이익을 겪어 왔는데 쓰레기 적환장을 만드는 것에 이어 화장장마저 들어오는 것은 주민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수원시의 일방적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2월 17일 또다시 이의동 청소차고지 앞에서 200여명의 주민들이 화장장 이전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이때 과격한 시위로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해 후송 후 치료를 받기도 했다.

3월 2일엔 세 번째 시위가 시청 앞 올림픽공원에서 열렸다. 200여명이 참여해 화장장 이의동 이전 반대를 외치는 한편 이의동지역 집단마을을 ‘자연취락지구’로 조성해줄 것과 ‘원천유원지 조성계획’을 조속 수립해 개발해 줄 것을 요구했다.

3월 15일 시위에는 인접해있는 용인군 상현리 주민들도 합류했다. 130여명이 이의동에 화장장건립을 절대 반대한다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까지 4차례에 걸쳐 940여명이 집단시위에 참여하여 화장장 이전을 적극 반대했다.

이들은 반대시위를 전개하는 한편 632명이 화장장 이전 반대 민원과 탄원서를 1995년 2월 23일 수원시와 경기도, 감사원 등에 제출했다. 3월 2일에는 용인군 상현리 주민대표 등 1320명이 화장장 이전 반대 진정서를 제출했다. 수원시는 주민대표와 진정성 있는 대화를 여러 차례 진행해 의견 접근을 보았다.

5월 20일에는 주민대표 8인이 ‘화장장 이전 설치계획 철회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원천유원지내 기존 가옥 양성화와 신개축 허용, 이의동 종합개발계획수립 개발 요청, 화장장 이전시 공해발생 유무 등 상세한 자료를 요구했다.

수원시는 그동안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종합해 이의동 종합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이의동 11개 자연부락을 ‘자연취락지역’으로 지정 개발 추진 ▷원천유원지 조성계획 수립 용역비로 1억원을 확보해 추진 ▷자연부락에 상·하수도 시설공사 추진 ▷마을 진입도로 6개 노선 6400m 개설 등의 계획을 발표했다.

아울러 화장장내 장례식장 운영을 마을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요청한 건에 대해서도 ‘지역주민대표회의 공동명의’로 하여 법적절차에 의거 요청하면 수원시의회의 승인을 거쳐 마을에 위탁하겠다고 발표했다.

수원시는 1995년 3월 27일 화장장 이전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위해 ‘화장장시설 신축공사 설계 작품 공모’를 실시했다. 장례식장, 화장장, 봉안당 등은 ‘도시미관을 저해하지 않아야 하고, 혐오감을 주지 않아야하며, 효를 상징하고, 웅장하고 엄숙한 조형미를 갖추고, 또한 편리하고 거부감이 없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초현대식의 시범적인 건축물이 되어야 한다’는 설계공모지침을 제시했다.

응모기간은 1995년 3월 28일부터 4월 6일까지였고, ‘당선작’으로 기본계획안을 채택 설계용역계약을 체결키로 했다. 1995년 4월 6일 응모 마감 결과, 총17개 건축사무소에서 응모,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원활한 행정추진을 위해 1995년 5월 19일 작품심사위원 16명을 위촉했다. 심사위원은 수원시에서 수원시장을 포함 4명, 수원시의회에서 수원시의회의장과 시의회 보사경제위원회위원장과 교수, 이의동 주민대표 등이 위촉됐다.

수원연화장 배치도.(자료=진우건축 김동훈 대표)

 

수원화장장 설계공모작품 심사과정에서 민선 제1기 시장선거가 진행됨에 따라 작품선정 절차가 연기됐다. 1995년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민선1기 수원시장에 심재덕 후보가 당선되자 중단되었던 화장장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수원화장장 설계공모작품 심사는 1995년 9월 26일 비공개로 실시한 결과, 진우종합건축사무소 김동훈 건축사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김동훈 대표는 “수원연화장의 정신은 바로 사람이었다. 죽은 사람도 위하고 산 사람도 위하는 건축이 되도록 노력 했다. 수원연화장은 ‘사람의 형상’을 본떠서 설계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주변 지역과의 친근성, 개방성을 도모하였으며, 도시의 중심시설로서 환경 친화적인 종합장사시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6년 1월 본격적인 설계에 들어갔다. 설계는 장례식장, 화장장, 봉안당 등에 대한 기본 및 실시설계가 마무리 되자 경기도 지방설계심사위원회의 설설계심의를 거쳐야 했다. 이어 1996년 2월 ㈜대우건설이 시공업체로 선정됐다.

시공을 위한 설계에 착수해 수원시 연화장에 대한 실시설계와 교통영향평가 등을 완료하고 드디어 1997년 12월 31일 수원시 연화장이 착공됐다. 1998년 4월 공사용 진입도로가 완성되어 2000년 8월 8일 공사비 355억원을 들여 착공 3년 만에 수원시 연화장이 준공됐다.

수원연화장 유택동산 위령탑.(사진=진우건축 김동훈 대표)

수원시 연화장은 최첨단 화장시설로 무연무취, 상시 공해가스 첨단감시시스템을 채택함으로써 이후 전국에 종합장사시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함에 따라 수원시는 장사문화 선도도시가 됐다.

수원연화장은 ▷추모의집(봉안당) ▷승화원(화장장) ▷장례식장 ▷산골장 ▷위령탑 등이 들어섰다. 화장로 9기, 유족대기실, 분골실, 안치실, 분향실 등을 갖추었다.

2002한국건축문화대상 상패.(사진=진우건축 김동훈 대표)

수원시연화장은 ‘종합장사시설’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받았다.

2000년 12월 13일 ‘대한민국환경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2한국건축문화대상’을 2002년 11월 22일 받았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대통령 국민장이 치러졌으며, 2012년 5월 27일에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3주기를 맞이해 추모비를 수원연화장 경내에 세웠다.

2010년 4월 24일에는 수원연화장에서 천안함 희생장병 6명의 화장식이 거행됐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함에 따라 안산지역 희생자 208명의 화장식을 치르기도 했다. 이 시설을 지은 심재덕 시장도 사후 여기에서 화장되어 장례를 치렀다.

故 노무현 前 대통령 추모비. (사진=진우건축 대표 김동훈)

수원연화장은 제20대 이상룡 시장의 혜안과 민선1기 심재덕 시장의 굳은 의지로 건립됐다.

특히 ‘님비’ 풍조를 모범적으로 해결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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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31)] 수원연화장 건립의 첫 단추는 이상룡 수원시장이 꿰었 |♣김충영의현미경

2024-02-05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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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31)] 수원연화장 건립의 첫 단추는 이상룡 수원시장이 꿰었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4.02.05 06:00

1920년경 건립한 수원최초 화장장 모습. (사진=수원시)

수원연화장(화장장) 건립 필요성을 제일 먼저 주장하고 부지를 선정한 사람은 이상룡 제20대 관선 수원시장이고,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이는 민선1기 심재덕 수원시장이다.

제20대 이상룡 전 수원시장. (사진=수원시)

 

1910년대 후반 수원 최초의 화장장이 세류동 825번지에 건립돼 운영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도 화장을 권장했으나 보편적인 장례문화로 자리잡지 못했다.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과 가난한 사람들의 화장이 차츰 늘어갔다.

1920년 동아일보에 수원관련 기사가 실렸다. ‘화장장과 인가의 거리가 가까워 날마다 사람 태우는 냄새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사를 살펴 볼 때 당시의 화장기술로는 매연과 악취를 막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 건립한 인계동 화장장 모습. (사진=수원시)

수원화장장 자리에 2005년 건립한 수원현충탑. (사진=김충영 필자)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화장이 늘어나자 매연과 악취 등으로 주민들의 생활불편은 물론 위생문제도 도외시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수원시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화장장 이전사업을 추진하여 1962년 8월 11일 인계동에 화장로 3기(1일 9구)를 처리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당시 수원화장장은 성남화장장을 제외하고는 경기도에서 유일한 화장장이어서 경기도 전역은 물론 충청권, 강원권에서도 이용했다.

1980년대 매탄택지개발사업 시행으로 매탄아파트, 권선아파트, 인계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화장장의 이전 요구가 시작됐다.

수원현충탑(구 화장터) 위치에서 바라본 임광아파트 전경. (사진=김충영 필자)

 

1987년 수원시청의 동수원 이전과 경기도문화예술회관이 들어서면서 화장장의 이전 요구는 한층 더 심화되기 시작했다.

화장장 이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매탄택지개발지구 내 임광아파트 1200세대가 들어서면서 부터다.

임광아파트 입주민들은 아파트가 들어서면 화장장은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입주 했다. 그런데 입주를 하고 살아보니 100여m 인접지에 있는 수원화장장의 폐해가 심각했다.

평일에도 몇 차례 화장이 진행됨에 따라 분진이 아파트에 날아들어 빨래에 내려앉는 하면 자동차에도 매연이 쌓일 정도였다. 날씨가 흐린 날에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여 생활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임광아파트 주민들은 화장장 이전을 요구하는 민원을 10여 차례 이상 제기했음에도 반응이 없자 수백 명이 시청에 찾아가서 여러 차례 집단행동을 했다. 필자도 임광아파트 주민이어서 당시 기억이 생생하다.

이 무렵 1987년 권선동 1015번지에 권선동성당이 자리 잡았다. 권선동 성당은 매교동 성당이 분가시킨 성당으로 950평 대지에 조립식 가건물이었다. 당시 김정원 프란치스코 주임신부는 제대로 된 성당을 지어야 하는 임무를 부여 받은 상태였다. 김 신부는 시청 앞 상업지역에 성당을 신축할 경우 주변이 유흥시설이 밀집되어 신앙생활에 불편을 초래함은 물론 주변 상가에도 불편을 줄 것을 우려했다.

김 신부는 수원시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수원화장장 자리에 성당을 지으면 성당의 면모도 갖추고 수원시의 골칫거리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천주교수원교구장인 김남수 주교에게 상의한 결과 긍정적인 답변을 얻게 되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천주교수원교구는 경기도와 수원시 당국자와 만남을 가졌는데 임사빈 경기도지사와 유석보 수원시장, 김남수 주교, 김정원 신부가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천주교수원교구측은 안성군 보개면에 있는 천주교수원교구 공원묘지에 수원화장장을 이전하고, 인계동 화장장부지 5000 평을 권선동 성당부지로 교환하자는 의견을 제시해 동의를 얻었다. 이 사업의 진행은 천주교수원교구가 주관해서 추진하기로 했다.

천주교수원교구는 안성군에 수원화장장 이전 허가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당시 안성군수는 본인 재임시절 혐오시설인 수원화장장을 안성에 유치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던지 주민들에게 수원화장장 이전 반대 시위를 유도했다. 이에 따라 결국 수원화장장 이전사업은 5년이라는 시간만 허비 한 채 원점으로 돌아가게 됐다. 이후 권선동성당은 권선동 3-2번지 일원에 30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을 새로 건립, 1998년 이전했다.

1994년 1월 제20대 수원시장에 취임한 이상룡 시장은 수원시가 당면한 사항 중 가장 시급한 사항이 수원화장장 이전이라고 생각하고 수원화장장 이전에 발 벗고 나섰다.

당시 이상룡 시장은 민선시대가 시작되면 선출직인 민선시장은 혐오시설인 화장장, 하수종말처리장, 쓰레기소각장 등을 추진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수원화장장 이전은 관선시장이 책임지고 확정짓지 않으면 민선시장은 영원히 옮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상룡 시장은 1994년 7월 수원화장장 이전 추진계획을 수립, 수원시의회에 보고 했다. 화장장 이전을 위해 후보지 선정 용역비를 확보해 1995년 안에 후보지를 선정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어 화장장 이전실무를 담당할 TF팀을 구성했다. TF팀단장은 김석만 보건사회국장으로 하여 조필상 사회과장이 책임반장을 맡고, 실무는 강명석 공중위생계장, 후임 김재복(전 영통보건소장), 이항우 주무관이 담당했다. 도시계획 분야는 최호운 주무관(현재 화성연구회 이사장)이 담당했다.

실무 TF팀은 7개월에 걸쳐 10여 개소를 선정하여 면밀한 검토 작업을 거쳐 최종 3개소로 좁혔다. ▷1후보지는 권선구 호매실동 일원 4만8700㎡(1만4731평)이, ▷제2후보지는 장안구 이목동 일원 12만8151㎡(3만8765평)이 선정됐다. ▷제3후보지는 팔달구 하동 일원 5만7694㎡(1만7452평)였다.

수원시는 압축된 후보지 3개소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이어 수원시의회 임시회 청원심사 특별위원회는 표결을 통해 팔달구 하동 20번지 일원을 수원화장장 부지로 선정했다.

그리고 1995년 2월 10일 제132회 수원시의회 본회의에서 공유재산 취득승인 동의를 받음으로써 최종 승인 됐다.

이상룡 시장은 짧은 재임기간(1994.1.~1995.4.) 동안 3대 혐오시설인 화장장, 쓰레기소각장, 하수종말처리장 증설과 수원야외음악당 건립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수원은 관선 마지막 시기 책임감이 투철한 목민관(牧民官)의 노력으로 민선시기로 전환되면서 큰 갈등 없이 3대 혐오시설을 슬기롭게 처리할 수 있어서 시민이 행복한 도시가 됐다.

고인이 된 이상룡 시장께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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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30)] 수원화성 복원의 숨은 일꾼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 |♣김충영의현미경

2024-01-22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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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30)] 수원화성 복원의 숨은 일꾼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4.01.22 06:00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사진=경기도)

수원화성 복원의 최대 공로자는 이병희 전 제1무임소장관이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인물은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화성복원의 숨은 공신이 있다. 바로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이다.

박정희 정권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국방유적 복원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문화재 사업의 초점은 ‘호국문화유적’ 복원사업에 맞춰져 있었다.

이 때 추진된 사업은 이순신 장군 유적과 진주성 복원사업, 낙성대, 제승당, 칠백의총, 충장사, 윤봉길 의사 유적, 행주산성, 강화전적지, 남한산성, 한양도성, 고창읍성, 홍주산성, 해미읍성, 문경관문 등이다.

수원 출신 이병희 국회의원 겸 제1무임소 장관은 당시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문화재 복원사업에 수원성곽 복원사업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고심을 거듭했다.

가칭 화산대효원종합계획 보고서(경기도, 1973. 11. 자료=화성박물관).

그리고 임수복 사무관(전 경기도지사 직무대행)에게 지시를 내렸다.

“임 사무관은 수원화성에 대한 역사공부를 철저히 하여 수원화성 복원 사업이 국방유적 복원사업에 포함되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임수복은 역사학자인 김병모 교수(현 고려문화재연구원장), 최영희 박사(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자문과 수원의 향토사학자인 안익승 씨 등과 함께 2개월여에 걸친 현장조사와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화산대효원종합계획(花山大孝園綜合計劃)’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 계획의 목적문은 “문예부흥기 정조대왕의 효사상이 집약된 융·건릉, 용주사 및 수원 일대에 산재한 문화재의 효역화(孝域化)를 통하여, 관광자원화 함으로써 민족고유의 효사상을 고취하고, 물질문명의 부산물인 퇴폐풍조를 새 시대에 알 맞는 윤리도덕관을 확립하여 애국애족 사상을 제고(提高)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적었다.

19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는 ‘화산대효원종합계획’서를 본 후 “문공부 장관은 종합계획을 세워서 보고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문화공보부장관은 ‘수원성곽 복원정화공사’ 세부계획을 세워 박정희 대통령에게 종합보고서를 올렸다.

그해 12월 드디어 ‘수원성곽 복원정화공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裁可)를 얻게 되면서 시행 준비에 들어갔다. 수원성곽 복원정화공사 추진은 문화재관리국의 주관 하에 제1무임소 장관실과 경기도, 수원시의 긴밀한 협조 체계로 실시됐다.

1975년 6월 7일 장안문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조병규 경기도지사, 이병희 국회의원, 이재덕 수원시장과 많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고 착공 4년 3개월 만인 1979년 9월에 공사가 마무리됐다.

그리고 1997년 12월 6일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는 1973년에 수립한 ‘화산대효원종합계획’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쾌거다.

이 방대한 종합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뒤에서 불철주야 노력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임수복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임수복은 “효심으로 이룩한 화산의 융·건릉과 수원화성의 복원은 지역의 정체성을 되살리는 것임은 물론, 수원시와 화성군의 귀중한 역사 관광자원을 먹거리 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국방유적 복원사업’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중압감을 갖고 추진했다”고 토로했다.

한편 임수복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재직기간동안 수원 지역의 현안사항 해결을 위해서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경기중소기업지원센터 전경. (사진=김충영 필자)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되자 중소기업이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체계적인 지원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경기도는 수원시 이의동 산111-8번지 일원 3만246평의 부지에 연건평 2만5402평의 경기중소기업지원센터 건립을 수립하게 된다. 경기중소기업지원센터가 수원에 자리 잡으면서 중소기업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경기도의 만성적인 교통체증 해소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수원지역 교통난 해소를 위해 1992년 개통된 의왕~과천간도로의 과천~우면산 구간 병목현상 개선을 위해 558억원을 투입하여 수원 등 북부지역 교통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수원 월드컵경기장 전경.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997년 12월 29일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경기 수원유치가 최종 확정됐다.

월드컵축구경기장 건설은 총 3107억원이 소요됐다. 토지보상은 수원시가 부담하고, 공사는 삼성이 전액 부담하는 조건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되자 삼성은 공사비 부담이 어렵다는 이유로 투자된 토목공사비 280억원을 끝으로 투자 중단을 통보해왔다. 경기도와 수원시는 월드컵경기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사업비를 60:40으로 부담하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국비 440억원, 삼성부담 280억원을 제외하고 잔여공사비의 60%인 1430억원은 경기도가, 40%인 957억원은 수원시가 부담해 축구경기장을 완공함으로써 월드컵 축구경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1998년 3월 5일 화성행궁 봉수당 준공행사가 개최됐다. 임수복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봉수당’ 준공식 축사에서 "화성행궁 철거는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간악한 정책이었다"며 "수원의료원 신축을 백지화하고 4년여 만에 ‘화성행궁 봉수당’을 복원함으로써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효’의 산교육장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임수복은 25년 전인 1973년 ‘화산대효원종합계획’을 ‘국방유적복원사업’에 포함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고심했던 기억을 상기하며 봉수당 복원을 위해 노력한 심재덕 수원시장과 김동휘 화성행궁복원 추진 위원장 등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밖에도 임 도지사 권한대행은 재임시절 경기도의 문화부문 등의 발전을 위해 경기문화재단 창립과 경기지방공사 창립, 경기도립 팝스오케스트라 창단, 도립국악당건립, 수원민자역사 추진, 경기방송 유치 등을 위해 노력해 경기도가 명실 공히 전국 제1의 광역지자체로 성장하는데 기초를 닦았다.

임수복 전 경기도지사 직무대행은?

1943년 수원시 곡반정동 임씨 집성촌인 온수골에서 태어났다. 세류초등학교와 수원북중을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 중동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ROTC장교로 임관해 중위로 예편했다. 1968년 무임소장관실 사무관에 임명돼 이병희 국회의원/무임소장관을 보좌했다.

무임소장관실 근무를 시작으로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경기도 하남시장, 군포시장, 광명시장을 거쳐 내무부 감사관, 국무총리실 제4행정조정실 심의관, 경기도 기획관리실장, 경기도 행정부지사를 역임했다.

1997년 9월 18일 이인제 도지사가 대통령선거 출마로 사임하면서 잔여 임기가 1년이 안됨에 따라 임수복 행정부지사가 1998년 6월 30일까지 10개월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을 수행했다.

공직에서 퇴임 후에는 연세대 초빙교수,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2014년 출범한 (사)한국실버경찰봉사대 중앙회장직을 맡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사)한국실버경찰봉사대는 비영리 민간단체로, 60세 이상의 직장은퇴자로 구성돼 인천.경기도를 중심으로 3000여 명이 대한민국의 생활안전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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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8)] 수원화성 박물관앞 선정비(박주수, 박기수)와 금성위 |♣김충영의현미경

2023-12-12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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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8)] 수원화성 박물관앞 선정비(박주수, 박기수)와 금성위 박명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12.11 04:30수정 2023.12.11 10:36

수원화성박물관앞 수원유수 선정비. 2008년 화성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노송지대에 있던 선정비 10기를 옮겨 세웠다. (사진=김충영 필자)

조선시대 고을 입구에는 재임시절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송덕비, 공덕비, 불망비로도 표현)를 세웠다. 수원에는 주로 팔달문과 장안문 밖에 세웠는데 1950년 6.25를 겪으면서 훼손된 것을 노송지대로 옮겨 놓았다.

이후 수원박물관과 수원화성박물관을 건립하면서 구읍시절의 수원부 관련 공덕비는 수원박물관에 옮겼고, 수원유수부 관련 선정비는 수원화성 박물관 앞에 10기를 옮겨 세웠다.

1271년(고려 원종 12년) 수주목을 수원도호부로 개명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기에 앞서 수원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1793년 1월 12일 수원을 화성으로 개명하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고을 이름이 바뀌었음에도 오랫동안 불렸던 수원이름을 병용(倂用, 아울러 한데 씀)하는 경향이 있었다.

1895년 5월 갑오개혁 때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수원군으로 다시 환원됐다.

화성유수부는 102년간 유지됐는데 그동안 임명된 수원유수는 84명이었으며 평균 재임기간은 15개월 정도였다.

수원유수는 지방관이지만 외관직(外官職, 지방직)이 아닌 경관직(京官職, 중앙의 관직)으로 정2품의 고위 관직에 속해 한성부 판윤(判尹, 한성부의 으뜸벼슬)과 같은 품계였다.

수원유수는 행정의 수반이면서, 장용영 외영의 수장인 장용외사(壯勇外使)이자 화성행궁을 총관하는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이기도 했다.

유수부의 업무를 총괄하면서도 화성축성과 현륭원, 건릉, 화령전의 제사와 임금의 능원 행차를 맞이하는 임무와 장용외사로서 군사조련과 지휘 임무를 가졌다.

화성박물관앞 선정비 안내판. 수원유수를 지낸 서유린, 이헌기, 박주수, 박기수, 정원용, 서유구, 이약우, 김병기, 김병교, 이학수의 재임기간과 비 건립연도 등이 표기돼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현재 수원화성박물관 앞에는 수원유수 84명중 7명의 유수 선정비와 2명의 불망비, 판관 1명의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특이한 점은 박주수 불망비와 박기수의 선정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떤 사연으로 선정비가 세웠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유수인 박주수와 박기수는 금성위 박명원과 일가들이다. 순조는 박주수와 외사촌(내종사촌)간이다.

금성위 박명원은 14세에 영조의 셋째 딸 화평옹주와 혼인했는데 영조가 무척이나 사랑해 이현궁(梨峴宮, 종로구 인의동에 있던 궁)에 살게 했다. 사도세자의 어려움도 수시로 자문했다고 한다. 화평옹주가 1748년 22세 때 첫 딸을 낳던 중 난산으로 요절하게 되자 영조는 상가에 5차례나 찾았고, 장사를 지낸 후에도 7차례나 찾았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일화를 모은 ‘효우행록’과 옹주 묘비명을 친필로 지었다. 조선시대 부마는 재혼을 할 수 없었지만 첩은 들일 수 있었다. 이후 박명원은 첩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지만, 집안에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박명원은 1789년 7월 11일 어전회의에서 정조가 38세까지 왕자가 없음은 양주 배봉산의 영우원(永祐園, 사도세자의 묘)이 흉지이기 때문이라고 상소를 올렸다.

사도세자 묘 이장과 관련 1789년 7월 11일 정조 실록의 기사내용이다.

‘영우원(永祐園) 천장(遷葬, 이장)을 결정하였다. 상(上, 정조)이 원침(園寢)의 형국이 옅고 좁다고 여겨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원소(園所)는 그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가 어떠하며 관계 또한 어떠합니까. 오늘의 신하된 자로서 만세의 대계를 생각할 때 마음을 끝까지 쓰지 않을 수 없고 의리로 보아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신은 본래 감여(堪輿, 하늘과 땅)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일반이므로 다만 사람마다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 자연 상태)이 아닌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풍기(風氣, 자연의 기운)가 순하지 못하고 토성(土性, 흙의 성질)이 온전하지 못하고 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중략) …. 아! 병오년 5월과 9월의 변고(의빈성씨와 문효세자의 죽음)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외로이 홀로 위에 계시며 해는 점점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데 아직까지 뒤를 이을 자손이 더디어지고 있습니다.”(이하 생략)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를 계기로 1789년 7월 15일부터 구읍 이전을 시작, 1789년 10월 7일 사도세자의 묘를 구읍 화산에 현륭원을 조성하게 된다. 한편으로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건설했다. 그리고 1790년 6월 8일 순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살아 생전에 어제(御製, 임금이 만듬) 신도비문(神道碑文, 묘소 앞에 세운비석) 3개를 남겼다. 충무공 이순신과 우암 송시열, 금성위 박명원 등 세분에 대한 신도비문을 내렸다.

충무공과 우암은 죽은 신하를 기리기 위함이라면, 금성위 박명원은 정조가 생전에 가장 신뢰하였던 신하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금성위의 신도비에 정조가 이르길,

“1789년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자리(수원화성)에다 억만년 끝이 없을 기반을 잡은 것은 공의 정성과 공로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내가 그래서 작년 가을 이후로 공을 은인(恩人)이요, 훈구(勳舊, 나라를 구한 공신)로 여긴다 한 것이다.” 라고 했다.

반남 박씨 가문은 왕실은 물론 수원과 깊은 연을 맸고 있다. 박명원으로부터 6대조 대에서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를 배출했다. 5대조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는 정안옹주(定安翁主, 선조의 5녀) 부마가 됐다.

박명원과 8촌 지간인 능주목사 박좌원은 슬하에 우부승지 박종신을 두었는데 그는 수원유수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박기수를 두었다.

금성위 박명원의 8촌 동생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세 번이나 다녀왔다. 1780년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단으로 북경에 갈 때, 8촌 동생인 연암 박지원을 자제군관으로 끼워 넣어 함께 다녀오게 된다. 이때 박지원은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쓰게 된다. 박지원은 슬하에 경산현령 박종채를 두었는데 그는 수원유수와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를 두었다.

또한 박명원과 16촌간인 형조판서 박준원은 슬하에 호조판서 박종보와 가순궁 유빈 박 씨를 두었는데 박종보는 수원유수와 예조판서를 지낸 박주수를 두었다. 가순궁 유빈박씨는 정조와의 사이에서 순조를 낳았다.

박주수, 박기수 선정비. 오른쪽이 박주수, 오른쪽이 박기수 선정비. (사진=김충영 필자)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로 융·건릉이 조성됐으며, 오늘의 수원 신도시가 건설됐다. 가문에서는 수원유수 3명을 배출했다.

첫 번째, 박명원과 16촌지간인 박준원의 손자 박주수(1828.3~1830.3)는 수원유수를 거쳐 한성판윤, 병조판서를 지냈다.

두 번째, 박명원과 8촌지간인 박좌원의 손자인 박기수(1831.2~1832.1)는 수원유수를 지낸 뒤 이조참의, 대사성,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세 번째, 박명원과 8촌지간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1876.8~1876.12)는 대제학, 우의정을 지낸 뒤 수원유수를 마지막으로 별세했다.

얼마 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위치한 화성박물관 앞에 있는 방방카페에서 전 장안보건소장 김혜경 씨와 그의 아들 박호우 씨를 우연히 만났다. 그 자리에서 본인이 수원유수를 지낸 박기수의 후손이라는 이야기와 평생을 기록한 문집 내용을 듣게 됐다. ‘이탄재집’이다.

박기수는 1831년 수원유수로 부임하여 부민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남의 재물을 착복하는 토호(土豪, 지방의 세력가)를 징계함으로써 부민들을 안심하게 했고, 수원 서호에 항미정(杭眉亭)을 건립했으며, 독산성을 개축했다. 수원화성 건설 이후의 수원의 현황을 기록한 ‘화성지(華城誌)군읍지’를 편찬했다.

박주수는 1828년 5월 비변사(備邊司, 중앙의 기구) 등록에 수원 속읍 안산 등 3개 읍에 환곡(還穀, 식량이 부족한 백성에게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는 제도 )이 적어 나누어 줄 수 없게 되자, 효명세자로 하여금 남한산성의 군량미 사용을 승인받았으며, 여러 차례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세금을 탕감(蕩減, 감해주다)해주고, 구휼미를 나누어 주어 주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박주수는 개인문집이 없어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박규수는 개인문집 '환재집'을 남겼으나 중앙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수원유수를 6개월 정도 지내 수원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재해가 발생하자 중앙에 건의해 구휼미를 제공한 기록이 있다.

수원화성 관련 사료는 정조시대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수원유수를 지낸 박기수의 문집인 ‘이탄재집’의 등장은 정조 이후 수원의 역사를 조명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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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7)] 수원은 ‘명당’과 ‘인재’의 만남으로 발전했다- 김 |♣김충영의현미경

2023-11-20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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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7)] 수원은 ‘명당’과 ‘인재’의 만남으로 발전했다-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11.20 05:05

수원지방 대동여지도. 1834년 김정호가 작성한 대동여지도를 통해 수원지방이 명당임이 표현된 지도. 오른쪽 중간 부분에 연결된 산맥이 안성 칠현산에서 분기한 한남정맥이다. 용인 석성산을 거쳐 광교산~오봉산~수리산을 거쳐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진다. 광교산을 주봉으로 동쪽은 곡반정동까지, 외곽으로는 청명산을 거쳐 경희대, 세마대 죽미령을 지나 독산성에 이어진다. 서쪽은 칠보산을 거쳐 화산 융·건릉으로 이어져 수원은 내부 산맥과 외곽의 산맥이 형성되어 분지를 이룬다. 분지에는 4개의 하천이 하류 황구지천으로 모아진다. 또한 8방향으로 길이 뻗어있어 4통8달한 곳이다. (자료=수원시)

수원은 지리적으로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거기에 더해 훌륭한 인재를 만나면서 발전했다.

첫째, 백두대간에서 비롯된 한남정맥의 주봉인 광교산은 지맥에 화산(花山)을 만들었다. 수원 구읍 화산은 800개의 산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불렸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의 산맥은 동서로 에워싸 분지를 이뤘는데 이로 인해 수원은 단일 수계를 형성해 타지방의 물이 넘어 오지 않는 지형이다. 즉, 내 땅 물만 처리하게 됨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아 물로부터 안전한 도시가 됐다.

둘째, 수원은 지리적으로 수도 서울의 관문에 위치했다. 1794년(정조18) 예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 홍양호는 장안문 상량문에서 “화성은 큰 도읍지요 수호해야 할 땅이다. 땅은 바다를 등지고 한강에 임해서 서울 백리의 경계에 걸터앉았고 영남을 당기고 호남을 눌러서 큰 길이 사방으로 통하는 곳에 자리 잡았네” 라고 표현하여 수원이 지리적으로 요충지임을 밝혔다.

풍수지리에서는 죽은 사람의 묘자리를 음택, 산사람의 집터를 양택으로 구분 한다.

수원이 명당임을 알아본 사람은 선조 때 좌의정 기자헌이었다. 기자헌은 선조의 능을 수원의 화산에 써야 한다고 했다. 효종 때 윤선도 역시 효종의 능자리로 수원부 화산이 최고라고 했다. 반계 유형원은 수원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북평(北平)에 있는 팔달산자락으로 읍치를 옮기면 장차 1만호가 되는 대도회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수원의 뛰어난 지세를 알아본 사람은 위대한 군주 정조대왕이었다. 정조의 마음을 대변한 사람은 금성위 박명원이다. 1789년 7월 11일(정조13년) 어전회의에서 전하(정조)께서 왕자가 없는 것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이 흉지이기 때문이므로 명당으로 이장을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원의 지리적 장점을 모두 취했다. 음택 명당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쓰고, 양택 명당에 신읍을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기용했다.

정약용에게 화성설계를 맡겨 화성축성의 기본계획을 수립하게 했다. 채제공에게 화성건설의 총리대신 겸 초대 화성유수를 맡겨 현륭원 조성과 신읍, 화성건설의 총책임을 맡겼다. 조심태는 수원부사로 임명해 현륭원과 신읍, 화성축성의 실무를 전담케 했다. 정조는 이들을 기용해 역사에 길이 남을 현륭원과 화성 건설을 이룩했다.

정조는 “우리가 이룩한 역사(役使)가 사사로이 한 일이 아니므로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자세한 기록을 남기라”고 주문했다. 당시 현륭원을 조성한 기록, 화성을 만든 기록, 혜경궁홍씨 회갑연을 수행한 기록 등과 ‘홍재전서’, ‘승정원일기’ 등의 많은 기록을 남겼다.

현륭원과 신읍, 화성건설에 참여한 이들 또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 채제공의 ‘번암집’, 조심태의 ‘수원부하지초록’ 등이다. 이외에도 수원유수를 지낸 많은 이들이 문집과 유물을 많이 나겼다.

지리적으로 좋은 여건과 훌륭한 인재들의 노력으로 건설된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됐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은 이병희 국회의원이다. 박정희 정부가 중점사업으로 추진한 국방유적 복원사업에 수원화성 복원사업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는 경기도청이 수원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1963년 수원유치를 성사시켰다. 1969년에는 삼성전자를 유치하고, 뒤이어 성균관대학을 수원에 유치했다. 이는 수원발전의 초석이 됐다.

이후 수원문화원장인 심재덕은 수원화성에 관심을 갖고 활동한다. 화성행궁 자리에 위치한 경기도립병원(수원의료원)이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을 다시 짓겠다고 하자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임사빈 도지사를 설득, 경기도립병원을 연초제조창 옆으로 이전해 짓게 했다. 초대 민선시장이 되어서는 화성행궁 복원에 열중했다. 이어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일에 몰두했다.

혼신을 다해 2002년 월드컵경기를 수원에 유치했다. 그러면서 외국관광객들에게 부끄러운 화장실을 보여줄 수 없다하여 화장실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화장실 문화를 일거에 바꾸는 쾌거였다. 이러한 활동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화장실 문화 개선운동을 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수원은 지리적으로 뛰어난 장점을 가진 고장이다. 수원은 여기에 조선시대 탁월한 지도자 정조와 총리대신 번암 채제공, 화성유수 조심태, 국회의원 이병희, 수원시장 심재덕 등 탁월한 인재들이 중요한 변곡점에서 뛰어난 지혜를 발휘했다.

수원은 전국적으로는 광역시인 울산의 인구를 뛰어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늘의 수원은 인접 도시에 비해 행정구역이 협소하다. 대도시로 성장하는 인접의 용인, 화성, 오산, 평택 등과 역할 분담이 필요한 시점이다. 행정, 교육, 문화관광, 연구개발 등의 전략이 필요하다.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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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6)] 수원화성의 비경은 성벽과 어우러진 억새밭- 김충영 |♣김충영의현미경

2023-11-05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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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6)] 수원화성의 비경은 성벽과 어우러진 억새밭- 김충영 논설위원(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11.04 04:02수정 2023.11.04 04:25

수원화성의 억새꽃밭 중 으뜸 경관인 화서공원 서북각루 뒤편. (사진=김충영 필자)

올해 12월 6일은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26주년이 되는 날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수원시는 성곽시설을 복원정비하고, 성곽주변의 불량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에 많은 부분이 변화됐다.

단순히 성곽만을 보여주고자 함은 아니었다. 수원화성을 통해서 수원의 정체성을 높이고, 수원화성을 통해 잘사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쉽지는 않았다. 관광의 3요소인 먹을거리, 볼거리, 살거리를 갖추는 일은 시간과 노력, 자금이 투입돼야 했다.

시작은 정조대왕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완성한 ‘무예도보통지’의 무예24기 무술 시연을 2004년부터 상설공연으로 추진했다. 상설공연 20년을 맞으면서 이제는 수원의 대표적인 공연으로 자리매김했다.

두 번째는 볼거리를 만드는 방편으로 불량지역을 정비한 후 성 밖 공원에 억새밭을 조성하는 계획이었다. 이 사업을 적극 추천한 사람은 전통문화학교 정재훈 교수(전 문화재관리국장, 전 문화재심의위원)였다.

성곽 앞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성 주변에 나무가 있으면 전쟁 시에 장애물이 되어 적을 살피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에 성곽주변에 억새를 심었다. 억새는 불화살 재료로 쓰임은 물론, 이엉을 엮는 지붕재료로 쓰였고, 봄철 새싹은 나물로도 좋은 음식재료가 돼 구황식물이 됐다. 또한 약재 효과가 많아 한약재로도 쓰였다. 정재훈 교수의 추천으로 심은 억새꽃은 수원화성의 비경중의 으뜸이 됐다.

먹을거리는 ‘수원생태교통 2013’ 행사로 신풍, 장안동지역이 카페거리로 탈바꿈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됐다. 살거리는 230년 전통의 팔달문 주변 전통시장이 있어 관광객과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수원화성에는 억새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수원화성 주변에 억새밭이 조성된 곳은 지동 시장 뒤 동남각루 밖과 동북공심돈 뒤편에서 용연으로 이어지는 연무동 지역이다. 화서문에서 팔달산 회주로까지 이어지는 구간의 억새밭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동북공심돈 뒤 연무동 억새밭. 하늘거리는 억새밭 사이로 보이는 동북공심돈이 너무 멋있어 보인다. (사진=김충영 필자)

동북공심돈 뒤편 억새밭은 2006년에 조성했다. 연무대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창룡문 사거리까지 가서 동북공심돈 뒤편으로 돌아가면 억새밭이 보인다. 억새밭 밑에서 성벽과 동북공심돈을 바라보면 하늘거리는 억새꽃이 장관을 이룬다.

연무동 주차장 지상의 억새밭. 2017년 연무동에 주차장을 만들면서 조성한 억새밭이다. 억새밭 가운데로 산책로가 조성돼 억새꽃 터널을 거닐 수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용지 옆에서 바라본 각건대와 억새밭. 각건대와 억새밭이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사진=김충영 필자)

성벽을 따라 걷다가 동북암문을 지나면 2017년에 조성한 연무주차장 윗부분의 억새밭이 기다린다. 산책로 양편 억새꽃 터널을 지날 수 있어 수원화성과 어우러진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게 된다.

아름다운 용지 모습. 억새밭을 지나면 용지에 연꽃이 결구돼 멋진 풍광을 뽐내며 순례객을 맞는다. 단연 수원화성의 제1경이다. (사진=김충영 필자)

이어 걸으면 용연주변의 억새밭을 만난다. 요즘 억새꽃을 배경을 사진을 찍는 선남선녀들이 줄을 지어 있다. 세상에서 물리지 않는 구경거리는 첫째가 사람구경이고, 둘째가 물구경, 셋째가 불구경이라고 했던가. 이곳에서는 불구경을 뺀 가을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용두석(龍頭石, 이무기 머리) 입에서 물을 토해내는 모습. 용연의 물 관리를 이무기에게 맡겼다. 졸지 말고 물 관리를 잘하면 승천시켜준다는 뜻이다. (사진=김충영 필자)

용연을 지나면 화홍문이다. 화홍문 뒤편 석조 이무기가 입에서 물을 토해낸다.

용연 물을 이무기 입을 통해 토해내게 한 것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게 꾀를 부리지 말고 물 관리를 잘하면 승천시켜주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그리고 징검다리.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징검다리를 놓아 운치를 더하고 있다. 여행객들이 용연을 가기 위해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이어 화홍문 뒤편의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화홍문의 7간수를 만난다. 화홍문은 무지개문을 뜻하는데 무지개색이 일곱가지 색인지를 우리 조상들도 알았던 것이다.

화홍문에서 장안문 밖의 영화동 공원 구간. 성벽을 따라 가족이 함께 걷는 모습이 정겹다. (사진=김충영 필자)

이어 성벽을 따라 영화동지역으로 200~300m를 걸으면 장안문이 나온다.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정문인데 아픔을 많이 겪었다. 1920년대 일제는 찻길을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양편을 철거함에 따라 장안문은 섬이 됐다. 1950년 한국전쟁당시 인민군이 장안문 안으로 숨어들자 유엔군이 폭탄을 투하해 성루가 무너졌다.

그러던 것을 1975~1979년 화성복원 때 복원했다. 1995년 민선1기 심재덕 시장은 화성을 일주하는 길을 만들기 위해 잘려진 양편에 보도육교를 만들었다. 이때 철재 다리를 놓는 것에 찬반이 많았다.

장안문과 북서적대. 일제강점기 장안문 양편을 철거해 도로를 만들면서 장안문은 로터리 안에 갇힌 섬이 됐다. 2006년 서쪽 부분을 연결하고 동쪽은 다리 형태로 보도육교를 만들었다. 시민들이 장안문을 통해 드나들고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필자가 화성사업소장으로 근무할 시기에 문화재청은 시한부로 허가를 해주었는데 철제다리를 철거하는 조건이었다. 그때 나는 이 기회에 장안문을 연결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사)화성연구회 회원, 전문가 등과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여 찾아낸 방법이 현재와 같이 서쪽부분을 연결하고 동쪽은 다리로 연결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시민들이 장안문을 통해 내왕하게 됐다.

1979년 화성복원사업 기념으로 조성한 장안공원. 조성 당시에는 도로에서 성곽을 볼 수 있도록 큰 나무를 심지 않았다. 44년이 지나면서 거목으로 성장했다. 장안공원에는 화성기적비와 화성복원정화비, 세계문화유산 등록 인증패, 역사적 세계유물 기념패 등이 설치돼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장안문을 지나면 장안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필자가 공무원 초임발령을 받고 참여해 만든 공원이다. 1979년 당시 큰 나무를 심으면 성곽을 가린다 하여 가늘고 작은 나무를 심은 것이 44년이 지난 오늘에는 거목으로 성장했다. 장안공원은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명소가 됐다.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화성시설물 중 몇 안되는 원형시설물이다. 서북공심돈은 정조의 지시로 세워졌다. 조형성이 뛰어나 수원시 마크로 사용될 정도로 화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화성어차가 통과하고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장안공원을 지나면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에 이른다. 화성시설물 중 몇 안 되는 원형태의 시설물이다. 서북공심돈은 당초 설계에 없던 것을 정조의 지시로 만들었다. 정조는 자기 구상으로 만들어진 서북공심돈에 대해서 자부심이 많았다.

이어 팔달산 방향으로 길을 건너면 화서공원이라는 표석이 보인다. 이 표석은 2004년에 세운 것인데 필자의 제안으로 세웠다. 화성 주변 공원은 장안문을 기준으로 서쪽은 팔달공원, 동쪽은 동공원으로 지정됐다. 그런데 1975~1979년 화성복원사업 때 조성한 성 밖 공원을 장안공원이라고 했다. 약속장소를 장안공원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문아파트를 철거하고 조성한 화서공원. 2004년 서문아파트를 철거하고 조성됐다. 화서공원 조성으로 주변 경관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 억새꽃의 멋진 경관은 수원화성의 품격을 높였다. (사진=김충영 필자)

서문아파트를 철거하고 조성한 공원을 팔달공원이나 장안안공원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소성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화서공원이라는 별칭을 사용하게 됐다.

화서공원에 오르면 성벽따라 억새밭이 이어진다. 이곳이 수원화성 억새밭의 원조 격이다.

2007년 어느 여학생이 억새밭에서 핸드폰을 잃었는데 찾을 수 없자 억새를 태우면 잘 보이겠다는 생각으로 불을 낸 일이 있다. 이후는 상상대로이다.

깊어가는 가을, 더 늦기 전에 성 밖 억새밭을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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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5)] 수원화성을 쌓은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 |♣김충영의현미경

2023-10-23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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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5)] 수원화성을 쌓은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10.23 06:00

화성부성조도(華城府城操圖). 1795년에 작성됐고 육군박물관에 소장됐다, 수원화성의 축성과정과 방어 전략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 어제성화주략에 3600보로 계획됐으나 100보가 늘어난 3700보로 기록됐다. 검은색은 성곽이 쌓인 부분이고, 붉은색은 아직 쌓지 않은 구역이다. 완성된 모습과는 많은 부분이 상이하다. (자료=수원시)

수원에 성곽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1790년 6월 10일(정조14) 부사직 강유의 상소로부터 시작됐다. 수원을 군사적 요충지로 만들고 사도세자의 원침을 수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읍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강유의 상소가 있은 후 8일이 지난 6월 18일 순조가 태어났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1년 1월 22일(정조15) 사직 신기경이 “수원의 부흥책과 도성방위를 위해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 정조는 신읍에 성곽을 축조하기로 결심한다. 정조는 성곽축조계획 수립을 정약용에게 지시했다. 다산이 수립한 기본계획을 받아들여 ‘어제성화주략(임금이 작성한 화성기본계획서)’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 계획서는 규모에 관한 내용과 재료에 관한 내용 등 여덟 가지 사항을 제시했다. 성의 규모는 3600보 높이는 2길 5자를 제시했다. 이후 정조가 1794년 1월 14일 수원에 행차하여 성터를 살펴봤다. 터를 잡기 위해 설치한 표지인 기표(旗標)가 북리(北里)의 인가를 꿰뚫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는 인화(人和)를 해치는 것”이라 했다.

정조는 성을 더 뒤로 물려서 성터를 정할 것을 지시하여 표를 세우니 이는 마치 유천의 모양인 버들잎 모양을 본뜬 구불구불한 모양이었다. 그 결과 성의 둘레가 3600보에서 4600보로 늘어나게 됐다.

재료에 관해서도 어떤 재료로 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벽돌로 쌓을 경우 기술부족은 물론 땔감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었다. 흙으로 쌓을 경우 견고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어 결국 돌을 재료로 하는 석성으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결정은 현륭원과 신읍건설을 담당했던 수원부사 조심태의 경험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공석면 숙지산의 2곳, 여기산 2곳, 권동에서 돌맥을 찾았다. 또 팔달산에서 성터를 닦던 중 왼쪽 산등성이에서 석맥을 발견했다.

이렇듯 성역 착공 1개월 전에 공석면의 숙지산과 여기산에서 돌맥이 발견되자 채제공은 “신(神)은 항상 신명(神明)이 이를 감춰두었다가 오늘을 기다린 것은 모두가 전하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당시의 감격을 정조께 아뢰었다.

숙지산 부석소. 현재 화서역벽산블루밍아파트 단지내 전망대 부분 숙지산 부석소 2개소 중 한 곳이다. 1970년대 초까지 석산으로 운영됐다. 1978년 화서주공아파트가 지어졌다가 2010년 화서역벽산블루밍아파트 단지로 재건축됐다. (사진=김충영 필자)

여기산 부석소. 1960년대말까지 석산으로 운영됐다. 1990년대 전경대 사격장으로 쓰이다가 전경대 막사로 이용되고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권동 부석소. 1970년대 초까지 석산으로 운영됐다. 1990년대 화서영광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사진=김충영 필자)

축성을 위해 채취한 돌의 숫자는 숙지산에서 8만1100덩이, 여기산에서 6만2400덩이, 권동에서 3만200덩이, 팔달산에서 1만3900덩이 등 합계 18만7600여 덩이였다.

석맥이 발견되자 실제로 일할 장인들을 확보해야 했다. 당시 장인이 일하는 곳은 정부기관에 소속된 관장(官匠)과 민간신분의 사장(私匠)이 있었다.

1793년 12월 6일 비변사에서 한양의 각급 관청인 장용영,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 용호영, 총융청, 내수사, 선공감, 상의원, 공조, 중부,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와서(瓦署)에 화성성역이 시작되니 해당석수를 다른 곳에 보내지 못하게 공문을 보냈다.

화성성역은 1794년 1월 7일 돌 뜨는 일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공사가 진행됐다. 화성축성공사는 화성성역소에서 372명과 22개 직종 장인 1821명, 전체 2193명이 참여했다.

화성성역 중 가장 비중이 많은 분야는 성벽을 쌓는 일이었다.

돌 관련 일은 부석소(돌 뜨는 장소)에서 돌 뜨는 일과 돌을 다듬는 일, 돌을 운반하는 일, 성벽을 쌓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체 장인 1821명중 석수가 642명으로 35.2%를 차지했다.

석수 642명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서울에서 209명이 참여했는데 이중 기관에 소속된 관장이 153명, 사장이 56명이다. 경기도에서 173명, 충청도 53명, 강원도 17명, 황해도 74명, 전라도 41명, 경상도 23명, 평안도 52명이 참여했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381명(59%)의 장인이 참여했다.

성돌은 크기에 따라 가격이 정해졌다. 큰 성돌은 뒷길이가 3자 5치에 한 변의 길이가 2자인 경우 8전, 중간돌은 길이가 3자에 한 변이 1자 8치인 경우 5전, 작은성돌은 길이가 2자 8치에 한 변이 1자 5치인 경우 3전으로 정해졌다.

성돌 외에 특수한 용도의 선단석(扇單石)은 크고 네모반듯한 돌로 큰 선단석은 길이 5자 2치, 너비 4자 1치, 높이 4자인 경우 15냥이었다. 또 값이 많이 나가는 돌로 아치에 쓰이는 홍예석으로 길이 5자 1치, 너비 2자, 높이 2자 7치로 값이 12냥이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채취장소별 돌의 특성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숙지산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가늘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 거칠고, 권동의 돌은 여기산과 같지만 결이 조금 더 가는 특성이 있고,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에 비하면 더 강하고 여기산 보다는 더 거친 속성을 지녔음을 적고 있다 .

갑인년(1794년) 1월 7일 돌 뜨기를 시작으로 수원화성 공사가 착공됐다. 화성을 만드는 일은 당초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여러 부분에서 성과급제를 도입하고, 돌의 채취 운반 등에 대해서도 규격을 정하여 단가를 정함으로써 공사기간을 단축하는 요인이 됐다.

화성을 만드는 기간은 34개월이 걸렸는데 중간에 6개월을 쉬었으므로 실제 공사에 소요된 기간은 28개월 만인 1796년 9월 10일 완료됐다.

화성기적비. 1991년 11월 수원시가 장안공원에 세웠다. 비문은 정조의 명으로 봉조하 김종수가 지었다. 글씨는 화성성역의궤 글(정리자)을 집자했고, 화성기적비명 제호는 소형 양근웅 선생이 전서체로 썼다.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기적비문(華城紀蹟碑文, 화성을 만든 연유를 적은 비문)’을 작성한 김종수는 “이는 신의 도우심도 있었지만, 정조의 신묘한 계획과 묘한 운영방법이 보통의 만 갑절이나 뛰어났음” 이라고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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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1)] 228년 전 수원에서 8일간 잔치가 열렸다- 김충영 |♣김충영의현미경

2023-10-08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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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1)] 228년 전 수원에서 8일간 잔치가 열렸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10.06 14:44수정 2023.10.06 14:55

정조대왕이 장안문 앞을 통과하는 능행차 재현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에 신읍이 건설되고 5년이 지난 1794년 새해가 되면서 화성 건설사업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795년(을묘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고,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회갑연은 농사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윤2월 화성행궁으로 결정됐다. 회갑연을 위해서는 궁중음악과 궁중무용, 궁중음식이 필요했기에 1794년 12월 11일 정리소(整理所)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해 준비했다.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잔치를 위한 60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인원이 참여해야 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서울에서 수원까지 행차해야 했다. 이 때까지 서울에서 수원까지는 과천을 거치는 제주대로(삼남길)를 이용했다.

당시 험한 과천의 남태령을 넘기 위해서는 도로 관리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길이 험해 6000여 명이 수원을 찾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 시흥과 안양을 거치는 시흥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준비 끝에 1795년 윤2월 4일 한강에서 배다리를 건너는 도강 예행연습을 가졌다. 정조는 이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과잉충성을 염려해 지침을 엄명했다.

첫째, 먼 곳에서 진이(珍異)한 음식을 구해다 바치지 말 것.

둘째, 음식 맛을 일반 시중의 습속을 따라 사미(奢靡, 사치하고 화려함)하게 내지 말 것.

셋째, 각 참(站, 역마을)은 개인적으로 물건을 진상하는 사헌(私獻, 사적으로 바치다)을 절대로 금할 것.

넷째, 여령(女伶, 기생)과 정재(呈才, 대궐안 잔치때 벌이던 춤과 노래)들은 각도에서 뽑아 올리지 말고, 내의원, 혜민서, 공조, 상방(尙房)에서 역을 지는 사람 중에서 약간 명을 뽑고, 화성 여령을 반반으로 배정할 것.

다섯째, 악공(樂工)과 여령들의 복식은 깨끗하게 하되, 화려하지 말 것.

여섯째, 왕의 진찬(進饌, 수라상)은 10여 그릇이 넘지 않도록 할 것.

일곱째, 연악(宴樂, 잔치음악)은 법악(法樂, 규정된 음악)과 다르므로 간편하게 하고, 악기도 서울과 화성에 있는 것을 보수해서 쓸 것.

정조는 그러고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행차 하루 전인 윤2월 8일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살피게 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8일간에 걸쳐 진행됐다.

첫째날(윤2월 9일), 정조는 창덕궁 영춘헌에서 나와 수정전에 가서 할머니(정순왕후)께 인사를 올렸다. 정조는 할머니가 궁에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비(妃, 효의 왕후 김씨)를 궁궐에 남게 했다. 그리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누이인 청연군주, 청선군주만을 대동하고 궁을 나섰다.

묘정(卯正, 오전 6섯시)에 세 번째 북이 울리자 정조는 융복(戎服, 군복)을 입고 말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두 누이는 가마를 탔다. ‘원행을묘정리의궤’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총리대신 채체공을 비롯, 1779명에 달하고, 말도 779필이나 됐다. 실제 잔치에 참여한 인원은 6000여 명으로 이 가운데 4500여명이 군인이며, 이중에서도 장용영 군사가 3000명에 이른다.

반차도에서 볼 수 있듯이 수백 개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115명의 기마악대가 연주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1779명의 행렬은 어림잡아도 1km는 넘었을 것이다.

한강에 배다리를 놓은 모습. 정조대왕능행차 공동재현 서울구간으로 배다리를 설치하여 통과하는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어가행렬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서 출발해 보신각 앞길을 통과, 청계천 대광통교와 소광통 돌다리를 건너 숭례문으로 이어졌다. 용산 방면에 이르자 구경꾼들이 언덕에 모여들었다. 정조는 이들을 막지말라고 명했다.

이어 한강 배다리에 이르렀다. 배다리 중간에 있는 홍살문에 이르자 정조는 말에서 내려 혜경궁 가마에 가서 문안을 드렸다. 정조는 배다리를 건너자 용양봉저정에 먼저 도착, 어머니가 쉴 곳을 점검했다. 정조는 용양봉저정에서 친히 어머니께 음식을 드렸다. 두 군주의 음식도 왕과 같았지만 수행원들의 음식은 직책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노량에서 음식을 들고 휴식을 취한 후 13리 떨어진 시행행궁을 향했다. 시흥은 원래 금천이었다. 회갑연을 준비하고 새길을 내면서 시흥현으로 고을 이름을 바꾸었다.

행렬은 용양봉저정을 떠나 만안현(속칭 만냥고개)을 거쳐 장생현(현 장승백이)을 거쳐 시흥 번대방평으로 향했다. 이어 시흥 문성동(지금의 시흥대로)에 이르러 정조는 행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 정조는 혜경궁 주변에 청포장(靑布帳, 푸른천막)을 치게한 다음 ‘미음다반(米飮茶盤, 대추를 삶은 음료수)’을 직접 올렸다.

정조는 정리사 윤행임을 불러 시흥궁에 먼저 가서 직접 검측하라고 이르고, 잠시 후 내가 먼저 가서 직접 살피겠다고 했다. 정조는 먼저 도착해 행궁을 두루 살피고, 어머니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모셨다. 시흥행궁은 이번 행차를 위해 새로 지었다. 정리사가 석선(夕膳, 저녁음식)을 가져오자 정조는 직접 어머니께 올렸다. 정조는 가는 곳 마다 이 일을 되풀이했다.

정조는 “일기가 청화하고 어머니가 건강하시니 경행(慶幸, 경사스럽고 다행한일)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한 후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리면서 “이 음식은 어머니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배불리 먹으라”고 했다.

둘째날(윤2월 10일), 시흥 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은 정조는 점심을 들기로 한 사근참행궁(의왕시청 별관 자리)으로 향했다. 어가는 지금의 시흥대로를 거쳐 안양을 향했다. 행차를 위해 새로 건설한 만안교를 건너 안양참에 이르자 행차를 잠시 쉬게 했다. 어가는 다시 출발해 사근참행궁(의왕시청 별관)에 도착했다. 정조는 먼저 사근참행궁 시설을 점검하고 어머니를 안으로 모신 뒤 오전 간식인 ‘주다소반과(晝茶別盤果)’와 ‘주수라(점심)을 들었다.

안양 만안교와 설명판. 시흥로는 1794년 4월부터 정조의 지시로 경기감사 서용보가 책임을 맡아 추진했다. (사진=김충영 필자)

이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조는 "백관과 군병이 비를 맞을 것이 걱정되지만 이곳에서 화성이 얼마 되지 않으니 오늘 도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우구(雨具)를 갖추고 출발했다. 행렬은 이어 미륵현에 이르렀다. 원래는 사근고개였으나 원행이 잦아지면서 미륵현으로 바꾸고, 다시 지지대로 바꾼 것이다. 정조는 다시 대열을 쉬게 하고 어머니께 문안을 드렸다. 어가는 다시 출발해 괴목정교를 지나 노송지대를 지났다. 노송지대는 정조의 화성행차가 잦아지자 가로변에 소나무를 심어 조성한 곳이다.

능행차 행렬이 노송지지를 지나는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진목정에 이르자 먼저 가있던 총리대신 채제공이 어가를 맞이하면서 고취(鼓吹, 힘을 내도록 격려하는 음악)를 연주했다. 이곳에서 어머니께 미음다반을 올렸다. 정조는 이곳에서 갑주(甲冑, 황금 갑옷과 투구)로 갈아입고 장안문으로 들어갔다. 여러 신하들과 화성유수 조심태가 장관(將官, 장수) 이하 군병들을 거느리고 길옆에서 엎드려 맞이했다.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어가)는 장안문에서 팔달문을 향하다가 오른편의 종가(종로)로 방향을 틀어 좌우군영의 앞길을 거쳐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로 들어갔다. 이어 좌익문, 중양문을 거쳐 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도착했다.

정조는 어머니를 봉수당 옆에 있는 장락당으로 모시고 들어가 주다별반과(晝茶別盤果)를 올리고, 저녁에는 석수라를 올렸다. 드디어 이틀에 걸친 행차가 끝난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처소인 유여택으로 가서 시신(侍臣, 가까이 모시는 신하)에게 일렀다.

“오늘 비에 젖은 것은 미안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매사 언제나 십분 원만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어제는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했고, 내일은 또 경사스러운 예(禮)가 많다. 수십리 길에 비가 오다가 문득 개이기도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더욱이 경작이 곧 시작될 시기에 논두렁이 젖었으니 어찌 농부들의 경사가 아니겠는가”

228년이 지난 2023년, 정조대왕 능행차는 서울시와 수원시, 화성시가 공동재현한다.

서울구간은 10월 8일 10:00~18시, 수원구간은 10월 8일~10월 9일 09:30~18:30, 화성구간은 10월 8일 11:00~13:30분에 각각 진행된다.

깊어가는 가을 조선 궁중문화의 정수인 화성능행차를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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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0)] 화성안 행궁동 한옥은 왜 사라졌을까? - 김충영 논 |♣김충영의현미경

2023-09-18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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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20)] 화성안 행궁동 한옥은 왜 사라졌을까?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9.18 04:00

1907년 수원 행궁동의 모습. 독일인 헤르만산더가 동남각루에서 장안문 방향으로 찍은 사진. 앞에 보이는 부분은 수원사가 있는 곳이고, 멀리 장안문과 화홍문이 보인다. 사진에는 초가집만 보인다. (사진=수원시)

수원에 본격적으로 한옥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현륭원을 조성하기 위해서 구 읍치를 팔달산 자락으로 옮기면서부터이다. 구읍을 옮기는 일은 1789년 7월 15일 부터 토지 및 가옥의 보상이 실시됐다. 보상금을 수령한 집에서는 구읍의 가옥을 해체하여 자력으로 이축(移築)했다.

구읍의 초기보상 계획은 244호를 대상으로 추진했으나 최종적으로는 75호가 늘어난 319호로 확정되어 보상이 진행됐다. 구읍 이주(신읍건설)가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1790년 7월 15일 정조는 신읍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방안으로 양곡을 나누어주라고 지시한다.

수원부사 조심태는 신읍에 거주하는 주민이 719호가 살고 있음을 보고한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원부 주민이 469호, 원주민 63호, 주인을 따라온 노비 또는 소작인 46호, 타지방에서 이사온 백성 141호에게 쌀을 나누어준 결과를 보고 한다. 신읍이 건설된 지 1년 만에 719호의 집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조대왕은 1790년 2월 수원 행차 때 신읍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이번 행차에 수원부를 두루 살펴보니 신읍과 관청은 비록 규모를 이루었으나 민가는 아직 두서가 없고 움집도 아니고 보루도 아니고 마치 달팽이 껍질 같고 게딱지와 같다. 대도회를 이루는 것은 날짜를 기약할 수 없는 일로 구읍보다 좋게 하는 일은 조정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으니 개선계획을 마련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이렇듯 허겁지겁 짓다보니 신읍 초기 모습은 번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5년이 지난 1794년 화성성역이 시작돼 34개월만인 1796년 9월 10일 성역이 완료됐다. 정조는 화성성역에 참여한 성역소의 관리와 장인들의 노고를 치하며, 5~6호 밖에 안 되던 곳이 이제 1000호가 되는 대도회로 발전했음을 치하한다.

1797년(정조21) 신읍의 안정된 발전을 위해 부유한 자 20인을 신읍에 이주시키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들에게 목재 구입을 돕는 방편으로 지급한 융자금을 매년 1000냥씩 반분하여 납부케 하는 등 시전의 활성화를 통한 기와집 짓기를 추진했다.

1933년 수원 행궁동 모습. 수원천과 장안문~팔달문간 도로, 사이에 팔부자거리가 보인다. 멀리 팔달산과 앞쪽에 화성행궁터에 수원의료원, 수원경찰서, 신풍초등학교 등이 보인다. 행궁동에는 낮은 한옥이 대부분이다. (사진=수원시)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수동에 팔부자거리가 있음을 볼 때 최종 8호가 유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수동의 옛 이름이 은혜를 널리 베푼 동이라 하여 보시동(普施洞)이라 했다.

신읍의 초기 모습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있었음에도 활성화는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조가 1800년에 돌아간 이후 국력이 급격하게 쇠락하여 1910년 나라를 잃게 됨에 따라 일제는 조선 침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토지조사 사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작성된 지적도에 가옥이 있는 대지가 1200호로 집계됐다.

1911년 화성안 행궁동 지적도. 빨간색은 당시까지 남아있던 관청 건물. 노란색은 가옥이 있던 대지, 보라색은 학교, 짙은녹색은 임야, 녹색은 농지이다. (자료=수원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화성축성이 완료된 1796년에 1000호에서 1911년까지 115년 동안 118호가 증가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성안 마을에는 한옥이 주류를 이뤘다.

화성행궁과 관아, 성곽시설의 수난은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된다. 1910년 조선총독부 법률 제1호로 ‘조선읍성 훼철령’을 제정하여 전국의 읍성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화성행궁과 성곽시설물이 차례차례 허물어졌다. 한옥이 본격적으로 훼손되는 시기는 1910년대 중반부터다. 장안문에서 팔달문간의 기존도로를 확장했고, 동서간의 도로는 새로이 도로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가옥(한옥)이 철거됐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구시가지 상점 현황. (자료=수원시)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해오면서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정책을 마련해서 시행했다. 1942년에 작성된 수원상공인 인명록에는 1929년부터 1935년 사이의 수원읍 상점 93개 업종 총 866개 업체가 등록됐다. 한국인이 74개 업종에 696개소, 일본인이 67개 업종에 121개소, 중국인이 2개 업종에 11개소를 운영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은 일본식 건물로 바뀌게 됐다.

1923년에는 천주교 수원본당이 북수동 팔부자거리에 자리 잡았다. 현재 북수원성당과 옛 소화초등학교가 팔부자거리 한옥 자리에 자리 잡으면서 한옥이 철거됐다. 또한 일제강점기 도심정비사업으로 계획한 팔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1954년 시행됨에 따라 팔달동, 남수동, 영동 일원의 약 3만평 지역에 있는 한옥이 헐리게 됐다.

수원은 1967년 경기도청의 유치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수원은 구시가지가 유일했다. 구시가지는 구읍 이주민들이 자력으로 지은 곳이라서 청소차와 소방차 한 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1947년 수원 행궁동 일원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수원시는 주민들의 생활불편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시계획으로 소방도로를 계획하게 된다. 이 계획은 시간이 지나면서 도로가 뚫리게 됐는데 한옥을 철거해야 도로가 만들어졌다. 도로가 없던 곳에 도로가 만들어지자 토지주들은 수익이 많은 2,3층의 양옥 건물을 지었다. 결국 소방도로 사업은 화성 내 한옥을 없애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이후 산업화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수원은 경기도 남부지방의 중심 상권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성안의 한옥은 더 이상 보존가치가 없는 건물이 되고 말았다. 하나둘씩 양옥 건물로 바뀌고 말았다.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면서 시행한 행궁광장 조성사업, 화성박물관, 전통문화센터, 수원시립미술관 등 사업을 추진하면서 많은 한옥이 없어졌다.

2022년 9월 수원 행궁동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위에서 언급한 것같이 화성 내에는 조선말까지 약 1200개의 한옥이 있었다. 그 많던 한옥은 혼란기를 겪으면서 하나둘씩 사라졌다. 9월 7일자 수원일보는 "2009년에 66채의 한옥이 남아 있었으나 2023년에는 43채로 감소했고, 그나마 양호한 건물은 13채에 불과하다"며 "화성 내 남아있는 한옥만이라도 온전한 보존이 시급하다"고 보도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신을 거울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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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19)] 광교산에 올라 옛 추억을 더듬다- 김충영 논설위원 |♣김충영의현미경

2023-09-04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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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19)] 광교산에 올라 옛 추억을 더듬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9.04 05:20수정 2023.09.04 05:21

광교산 시루봉에 세웠던 표석. 수원시가 1992년 12월 23일 시루봉에 세웠다가 2007년 광교산 아래 버스종점으로 옮겼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오래간만에 원천저수지에서 시작해 광교산을 오르니 예전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 일이다. 늦게 얻은 아들이 약하게 태어나 부모로서 항상 건강에 신경을 써야 했다. 어느 날 아내는 아들의 건강과 교육을 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당시 필자는 옛 지도에 관심이 많아 2000년에 수원의 옛 지도책 발간을 주관한 일이 있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이미 대동여지도에 대한 기본 상식을 갖고 있던 터라서 수원 매탄동 집에서 고향인 화성시 우정읍 쌍봉산까지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산맥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매탄동 집에서 제일 가까운 산은 원천유원지 입구 원천배수지 부분이었다.

수원지방 대동여지도.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했다. 수원지방은 광교산을 주봉으로 동쪽으로는 형제봉에서 문암골~경기대~경기남부경찰청~봉녕사~경기중소기업지원센터~아주대~원천배수지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광교산에서 지지대고개~의왕 오봉산~수리산~칠보산~수원대 뒷산~화산(융건릉)과 장안대 뒤 삼천병막골로 이어져 이곳에서 안중방향, 조암방향, 남양방향 등 3갈래로 갈라진다. (자료=수원시)

필자는 수원시 도시계획과장 시절인 2002년 광교택지개발사업지구 지정을 위한 기초조사와 타당성 검토 등을 거쳐 지구지정 신청 업무를 담당했다. 2003년 6월 10일자로 수원시 화성사업소가 출범하게 됨에 따라 세계문화유산을 전담하는 화성사업소로 자리를 옮겼다.

수원시 개발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터라서 광교지구에 대한 관심은 누구보다 많았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주말이면 원천저수지에서 경기대학교로 이어지는 산행을 하다가 고향인 우정읍 쌍봉산까지 산길을 걸었다. 산행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많은 모습을 사진에 담아 두기도 했다.

당시 산행을 하면서 수원의 산맥이 잘린 것을 아쉬워했다. 원천저수지부터 경기대학교까지 5km 정도 되는 구간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이미 2개소가 잘려 있었다. 경기남부경찰청 뒷부분으로 43번국도가 통과하면서 산길이, 월드컵경기장 옆으로 도로를 만들면서 산허리가 잘렸다. 당시는 광교택지개발사업에서도 2개 노선이 산맥을 관통하게 돼 산맥이 잘리게 될 형편이었다.

광교산에서 원천저수지까지 연결되는 산맥을 어떻게든 연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홍기헌 수원시의회 의장께 설명했다. 홍 의장은 뜻있는 수원시의원들과 함께 현장을 답사하자고 했다. 수원시의원 15명이 참여했고 필자는 원천저수지에서 경기대학교 구간의 현장을 안내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사단법인 광교산’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이 모임은 광교택지개발사업을 주관하는 경기도시공사로 하여금 광교산에서 원천저수지까지 이어지는 산맥에 4개소의 생태교량(에코브릿지)공사를 이끌어 냈다.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수원의 산맥을 지키게 된 것이다.

재미난 일화를 소개한다.

광교산에서 경기대학교를 거쳐 원천저수지로 연결되는 산맥은 역사 이래로 수원시와 용인시를 나누는 행정구역 경계지점이었다. 1983년 2월 15일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와 하리가 수원에 편입됐다.

광교산 표석 뒷면. 광교산의 유래를 적었다. 1992년 12월 23일 세운 표석.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시 제18대 이호선 시장은 초대 민선시장의 꿈을 가지고 수원시의 기념비적인 여러 사업을 전개했다. 1992년 12월 23일 광교산 정상 시루봉에 광교산 표석을 세웠다. 그런데 1997년 7월 16일 용인 연합신문이 광교산 표석이 용인시 구역임에도 수원시장 명의로 표석을 세웠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광교산 현재 표석. 용인시가 2007년 6월 16일 푯대봉에 세웠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후 용인시는 광교산 정상이 용인시 구역임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다.

또한 정상부분이 시루봉이 아니고 푯대봉이라고 주장했다. 시루봉은 정상에서 동쪽으로 150m 지점임을 주장하며 표석의 철거를 주장했다. 수원시는 눈물을 머금고 광교산 표석을 광교산 아래 버스종점 지점으로 옮기게 됐다. 용인시는 2007년 6월 16일 광교산 정상 582m 지점에 현재의 표석을 세웠다.

나비잠자리다리’ 경기대에서 원천저수지 구간 4개 생태교량 중 월드컵경기장 뒤편에 있는데 4개가 비슷한 형태. 2011년 8월에 완성했다.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의 지형은 전국에서도 특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도시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수원의 동쪽산맥에 4개소의 생태교량(에코브릿지)을 설치했다. 남쪽부터 살펴보면, 구법원 옆을 통과하는 ‘갈참나무 다리’, 아주대 옆으로 통과하는 ‘소나무다리’, 월드컵운동장 옆을 통과하는 ‘나비잠자리다리’, 경기남부경찰청 옆을 통과하는 ‘반딧불이다리’를 만들게 됨에 따라 산맥이 연결됐다. 서쪽 또한 칠보산에 생태교량을 만들면서 산맥이 연결됐다.

영동고속도로와 북부순환도로가 통과하면서 잘린 광교산.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그런데 팔달산으로 이어지는 중앙지점의 산맥에 영동고속도로와 북부순환도로가 통과하면서 산맥이 끊기게 됐다. 이 부분은 연결돼야 한다. 이는 수원의 정체성을 연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수원시민들의 건강과 여가 선용을 위한 산행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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