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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7)] 아쉽다! 심재덕 시장의 이루지 못한 꿈- 김충영 논 |김충영의현미경

2023-03-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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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7)] 아쉽다! 심재덕 시장의 이루지 못한 꿈-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3.20 01:10


세계적 야외공연장 조감도. 창룡문과 연무대 앞을 하나의 광장 겸 공원으로 계획한 조감도. (자료=수원시 화성주변 정비계획보고서)

1997년 12월 6일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25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원시는 혼신의 노력을 다해 오늘의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그 결과 요즘 수원화성의 주말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찾아온다.

필자는 매일 아침 매탄3동에서 경수산업도로를 통해 수원화성 내 매향동 작업실로 출퇴근을 한다. 지난 토요일 오후 2시쯤 동수원고가 차도~못골사거리~창룡문 사거리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동수원고가차도부터 차량이 밀렸다. 창룡문 사거리에서 몇 번의 신호를 받은 끝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성 안의 사정은 더욱 심각했다.

필자는 지난 2021년 1월 25일자 본란(3회차)에 ‘심재덕 시장의 이루지 못한 꿈-세계적 야외공연장’을 쓴 일이 있다. 시장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한 화성관련 사업은 창룡문과 연무대 사이의 끊어진 성곽을 잇기 위해 동서방향으로 지하차도를 건설하고 그 위에 세계적인 야외공연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단순히 하나의 야외공연장을 만드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화성의 100년을 내다보는 구상이었다. 심 시장이 수원문화원장 시절 외국의 많은 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내린 결론은 화성 내 관광객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수원화성의 기본구상은 관광객의 차량을 화성 밖에 주차시키고 창룡문을 통해 걸어 들어오거나 셔틀 차량을 이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추진한 일은 창룡문과 연무대 주변의 정비계획이었다.

첫 번째로 창룡문과 연무대 부분에 세계적인 야외공연장을 만들기 위해 동서방향의 지하차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끊어진 성곽을 연결하고 도로위를 덮어 공원을 만드는 일이었다.

세 번째는 창룡문 밖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창룡문앞을 정비해 광장을 조성하고 관광안내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네 번째는 창룡문 밖에 대형 주차장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창룡문 주변의 2022년 9월 모습.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심재덕 시장의 이러한 구상은 차근차근 진행됐다. 1996년부터 지하차도를 만들기 위해 기본설계에 착수했다. 그러나 동서방향으로 지하차도 건설이 어렵다는 여론에 따라 대안으로 성곽을 연결하는 통로 박스(Box)를 만들고 그 위를 덮어 야외공연장을 만드는 계획을 추진했다. 1차 사업으로 성곽연결 사업을 추진했다.

2차 사업은 2000년부터 창룡문 밖의 정비 사업이 진행됐다. 설계에 이어 보상이 추진되고 2001년부터는 공사가 추진됐다. 우선적으로 창룡문 앞에 계단식 광장이 조성되고 관광안내소와 1단계 주차장이 조성됐다.

3차 사업은 창룡문 안의 야외공연장 사업이 추진됐다. 우선적으로 활터(연무정)주변의 민가 보상이 추진됐고, 공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2002년 6월 심재덕 시장이 민선3기 선거에서 낙선했다. 후임 김용서 시장 인수 위원회는 창룡문 주변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사업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창룡문 안팎에서 진행되는 사업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이었다. 투자비에 비해 효과가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창룡문 밖 관광안내소(현재 수원플라잉사무소) 모습. (사진= 김충영 필자)

창룡문 밖에 추진되는 사업은 그 상태로 마무리 짓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특히 관광안내소가 전통양식이 아니라고 했다. 현대식 건물에 한옥 지붕을 씌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양복에 갓을 쓰는 모양이 될 것이라고 설득을 해서 그대로 둘 수 있었다.

창룡문 안쪽에 추진되는 야외공연장은 중단되고 대신 주차장이 조성됐다. 일련의 사업은 심재덕 시장의 낙선으로 인해 정책이 변경되면서 수원화성의 기본틀이 송두리째 바뀐 것이다. 오늘의 화성의 교통과 주차, 관광객동선 문제는 정책의 전환에 따라 발생된 문제점이다.

현재 팔달경찰서를 짓기위해 건물 철거가 완료된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제일 아쉬운 점은 이후에 진행됐어야 할 창룡문 밖 대형주차장 조성 사업이다. 기본구상의 변경으로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 그곳은 현재 건물 철거가 완료돼 얼마 안 있으면 지어질 수원 팔달경찰서 자리다.

심재덕 시장의 계획대로 추진돼 성 밖에 차량을 주차하고 창룡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면 오늘날 수원화성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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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6)] 숙지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 |김충영의현미경

2023-03-06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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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6)] 숙지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3.06 05:50

2022년 6월 숙지공원 항공사진. 숙지산을 공원으로 지정해서 임야가 대부분이다. 2003년과 2009년 농지에 축구장과 다목적체육관, 야외공연장, 산책로, 휴게시설, 주차장이 조성됐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967년 7월 3일 수립한 수원도시계획에서 숙지산 일원 27만3669㎡가 숙지공원으로 지정됐다.

 

숙지산(熟知山)은 수원화성 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89년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을 길지인 수원부의 화산으로 옮기기 위해 구읍을 오늘날의 수원으로 이전했다. 이후 정조는 신하들의 건의로 화성축성을 추진하게 된다. 화성축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1793년(정조17) 12월 6일 정조는 화성유수 조심태를 불러 물었다.

“돌 뜨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인데 돌 뜨는 곳이 고을 소재지에서 몇 리나 되는 거리에 있는가?”

하니, 조심태가 아뢰기를, “바로 3리나 7리 정도의 지점인데 길이 평탄하여 운반하기가 쉽습니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팔달산(八達山) 건너편의 지역은 읍과의 거리가 3리에 지나지 않고 석재(石材)가 많으면서도 좋아서 무진장하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그곳의 지명이 바로 공석면(空石面)이기에 신은 항상 신명이 이를 감춰두었다가 오늘을 기다린 것은 모두가 전하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숙지산 부석소(浮石所)돌 뜬 흔적.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성역의궤-권수’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돌 캐는 곳은 다섯 군데였는데, 숙지산에 두 군데, 여기산에 두 군데, 권동에 한 군데가 있다. 성을 쌓는 작업을 시작할 무렵까지는, 이 지방에서 돌이 나지 않았으므로 혹은 벽돌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토성을 쌓는 편이 낫다고 하여 의논이 여러 갈래로 갈려 일치되지 않았다.

수원부의 서쪽 5리쯤에 공석면(空石面)이 있고 여기에 숙지산이 있으며, 또 그 서쪽으로 5리쯤에는 여기산이 있다. 처음에는 이 두 산이 모두 흙으로 덮여서 조막만한 돌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다가 돌맥을 찾아서, 이 맥을 따라 파 들어갔다. 그리하여 가로세로 시렁처럼 층층으로 파내자 좋은 돌맥이 나타났다. 이 뒤에 권동에서도 돌맥을 찾았는데, 두 산에 버금가는 좋은 돌맥을 찾아냈다. 서성의 터 닦던 날에 팔달산의 왼쪽 등성이에서 남으로 용도에 이르기까지 600~700보나 되는 거리가 모두 돌맥으로 꽉 차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서성 일면은 모두 이 돌산에서 캐내어 사용했다.

대체로 숙지산의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곱고, 여기산의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은 거칠었다. 권동의 돌은 여기산 돌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곱고,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의 돌에 비해 더 강하고, 여기산 것보다 더 거칠었다.

여러 곳에서 떠낸 돌을 통틀어 계산하면 숙지산 돌이 약 8만1100여 덩어리, 여기산 돌이 약 6만2400덩어리, 권동에서 3만200덩어리, 팔달산에서 1만3900덩어리였다‘

화성을 축조하는데 전체 18만7600덩어리가 사용됐다. 숙지산에서 떠낸 돌은 화성축성에 들어간 돌의 43.2%의 돌을 떠낸 셈이다.

정조는 1796년(정조20) 1월 24일 현륭원을 참배하고 대유평을 지나 만석거에 이르러 화성에 쓰인 돌에 대해 말했다.

“면 이름을 공석(空石)이라 하고 산의 이름을 숙지(熟知)라 하였으니, 이른바 옛부터 돌이 없는 땅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오늘날 갑자기 셀 수 없이 단단한 돌을 내어 성 쌓는 용도가 됨으로써 돌이 비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하고 감탄했다.

1966년 11월 숙지산 항공사진. 북쪽 길옆에 하얀 부분이 연초제초창 앞 채석장이다. 남쪽 하얀 부분이 화성아파트가 있던 채석장이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숙지산에서 돌 뜨기는 화성축성 당시 시작돼 19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채석장은 2곳이 있었는데 가장 많이 돌을 뜬 곳은 숙지산의 남쪽 부분이다. 이곳은 돌을 많이 떠서 숙지산 정상부분 남쪽에 벼랑이 만들어 지기까지 했다. 숙지산은 후방에서 적을 살피는 척후돈대(斥候墩臺)가 있어 화성과는 밀접한 관계였다.

1975년으로 기억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쌀 3천만 석 달성을 독려하기 위해 해마다 농촌진흥청을 방문했다. 필자는 당시 수원 1번 버스가 유일했던 시절 농촌진흥청으로 출근하기 위해서 수원극장 앞에서 버스를 탔다. 하루는 버스타고 출근을 하다가 숙지산을 바라보니 채석장이 푸른색으로 변한 것이 보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박 대통령이 농촌진흥청을 방문하기 때문에 숙지산 석산이 흉해서 시청에서 푸른 그물을 씌웠다는 것이다. 숙지산 석산은 1970년대 말 주공아파트 단지가 건설됐다.

1974년 8월 숙지산 항공사진. 1966년에 비해 채석장이 몇십배 확장된 모습이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 서비스)

숙지산 두번째 석산은 연초제조창 앞에 있었다. 이곳 역시 1970년대까지 석산이 운영됐다. 이곳은 돌을 많이 채취해 석산이 도로보다 깊이 파이게 되면서 흉지로 변했다. 당시 수원시는 쓰레기처리장이 없어 쓰레기를 버릴 곳이 없게 되자 이곳에 쓰레기를 메우는 우를 범했다.

숙지산은 공원으로 지정됐다. 수원 도심의 근린공원은 대부분 1967년과 1969년 잘 가꾸어진 임야와 저수지를 지정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라서 공원 지정만 한 채 방치한 상태였다.

수원에서 제일 먼저 공원을 조성한 곳은 장안공원이다. 장안공원은 1975~1979년 화성복원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관문공원으로 조성했다. 이후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확보된 공원부지에 놀이기구와 수목을 적당히 심어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도였다.

1981년으로 기억된다. 수원시 도시과에는 도시행정계, 도시계획계, 구획정리계가 있었다. 당시 도시행정계장으로 정 모 계장이 근무했다. 정 계장은 가끔 필자에게 숙지산 공원에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산과 전답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 20여년이 지나 필자가 도시계획과장을 하던 2000년경에 찾아 오셨다.

“세상에, 공원으로 지정한지 30년

이 지났는데 보상을 안해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주변은 모두 주거지역이 돼 땅값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고 자녀들이 성장해서 집도 마련해주고 해야 한다고 했다. 본인은 집에서 가장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고 시청에 그리 오래 다녔으면서 그것도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고 항의한다는 것이다. 보상을 안해주려면 해제해 달라고 했다.

2003년 11월 8일 숙지공원 조성공사 기공식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숙지공원의 변화라면 1987년 수원시는 북서부지역 상수도 공급을 위해 정상부분 9846㎡의 부지에 1만 톤 규모의 상수도 배수지가 설치됐을 뿐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민들의 끈질긴 요구로 일부 농경지를 보상하게 되자 2003년부터 공원 조성이 시작됐다. 2000년 11월 8일 숙지공원 조성공사가 시작됐다. 당시 공원조성은 이미 보상이 완료된 농지에 운동장과 편의시설을 만드는 정도의 사업이었다.

2009년 7월 10일 숙지공원다목적체육관 개관식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후 2008년 8월 25일이 되어서 숙지다목적체육관 건립공사가 추진됐다. 체육관은 철골조 샌드위치 판넬 1277㎡(386평)로 배드민턴 6면, 농구 1면, 배구 1면, 관람석 336석과 관리동의 체육관을 28억8640만원의 예산을 들여 건립했다.

여기산 공원 조성계획도. 1967년 공원이 지정 후 56년 진행 중인 여기산 공원이다.

숙지산은 현재 '孰'자와 '知'를 쓴다. 예전엔 '熟(익힐 숙)'자를 썼다. 그러니까 '익히 알았다'는 뜻이다.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 지 익히 알았다(熟知)는 뜻이다.

수원은 어디를 가나 화성과 관련된 유적이 있다. 정조대왕의 일화가 있는 도시임을 긍지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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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5)] 여기산 · 서호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 |김충영의현미경

2023-02-2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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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5)] 여기산 · 서호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2.20 05:20

여기산 · 서호 공원 항공사진(2022년 6월). 여기산과 서호 농촌진흥청 시험답, 왼쪽에 농촌진흥청 건물과 도로변에 농업박물관 건립이 완료된 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1967년 7월 3일 52만㎡ 여기산이 공원으로 지정됐다. 여기산은 해발 104.8m의 산으로 산 정상부에 453m의 테뫼식 산성이 있다. 1979~1984년 발굴된 토기 및 철촉, 방추차, 온돌 구조 및 집 자리는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및 초기 철기시대의 생활유적지로 확인됐다. 여기산은 화성축성 당시 팔달산과 숙지산, 앵봉과 함께 성돌을 채취한 채석장이었다. 여기산 채석장은 1970년대까지 운영됐다.

축만제 표석. 1799년 축만제(서호) 제방에 세운 표석이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후 1976년 3월 27일 서호가 추가 편입되어 62만1994㎡가 됐다. ‘여기산 · 서호공원’이 된 것이다.

서호는 축만제(祝萬堤)로서 1799년(정조23)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만들었다.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제2020-1130호)에 따라 공식적으로 원래의 축만제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정조는 1795년 ‘만석거(萬石渠)’ 축조에 이어 1797년 만년제(萬年堤)를 축조하고, 당시 화성유수 서유린에게 화성 서쪽에 저수지와 둔전인 국영농장 건설을 지시했다. 이것이 축만제, 즉 서호다. 천년만년 ‘만석(萬石)’의 생산을 축원하는 뜻이 있다.

‘화성지’, ‘수원읍지’를 살펴보면 축만제는 수원부 치소로부터 서5리 북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길이 1246척, 넓이 720척, 높이 8척, 두께 7척5촌, 깊이 7척, 수문2곳, 몽리답 232섬지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저수지 한복판에는 인공섬을 만들었다.

저수지가 축조되자 정조는 ‘축만제둔’을 조성했다. 오늘날 서둔이란 지명은 여기서 유래한다.

정조는 화성건설 이후 수원을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자립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화성 유지관리 비용을 둔전운영을 통해서 조달하고자 했다. 축만제는 정조시대 농업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31년(순조31)에 건립된 항미정. 항주의 서호 미목(아름다운 눈섭)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면 네칸에 측면 칸 반의 규모로 ‘ㄱ’자 모습의 43.5㎡ 정자이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831년(순조31) 항미정을 건립하여 서호낙조(西湖落照 : 해질녁 낙조 드리운 서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탄생했다. 일제 때 만든 ‘조선명승실기(朝鮮名勝實記)에 143곳의 명승지 중 서울과 금강산에 이어 세 번째로 아름다운 곳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1906년 근대적인 농법을 전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일제의 농업책 수행기관 ‘권업모범장’이 이곳에 설치됐다. 1929년 ‘농사시험장’으로 개편하여 시험 · 연구 사업을 추진했다. 1944년 5월에는 ‘농업시험장’으로 개칭하고 농사시험 · 연구기구를 일원화하고 재배기술을 농촌에 보급하는 일을 담당했다.

1946년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중앙농사시험장으로 개칭되었다가, 1947년 농사개량원, 1949년 농업기술원, 1957년 농사원으로 개편하고, 1962년 농촌진흥청으로 개편하여 국내 최대 농업 관련 국가기구로 발전했다. 농촌진흥청은 1970년대 부족한 식량자원 확보를 위해 쌀 3천 만석 사업을 전개해 달성했다.

필자와 여기산·서호공원과의 인연은 1973년 10월 수원공업고등학교 3학년 때 농촌진흥청 산하 농업기술연구소(현 국립농업과학원)에 실습을 나가면서부터다. 군에 입대하기 전인 1976년 8월까지 3년 가까이 여기산과 서호 옆에서 지냈다.

가끔 점심을 먹고는 서호 제방을 산책 하거나 여기산을 오르기도 했다. 1975년 초겨울에는 저수지 물이 바닥을 보인 일도 있었다. 얼음판 밑 1m 정도의 가물치를 큰 돌을 내리쳐 잡은 기억이 난다.

이 시절 수원에는 현대식 공원하나 없었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공간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팔달산과 서호, 원천유원지 정도였다.

서호는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 이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수원시민들의 휴식 장소이자 놀이터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을 받은 곳이다.

1993년 11월 여기산 · 서호 항공사진. 서호 상류에 직사각형으로 설치된 강중폭기조(간이정화시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1967년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으로 서울~수원간 도로 확장이 필요했다. 수원시는 도로건설비를 줄이기 위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추진했다. 1968년부터 영화1·2지구와 파송1·2지구가 개발되면서 북수원 서호천 유역에 거주민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당시 수원은 오폐수 처리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오폐수가 하천을 통해 저수지로 유입됐다. 1970년대 말 저수지 오염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농촌진흥청은 오염방지를 위해 서호주변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시민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시민을 통제한다고 수질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당시 오수 차집관거 설치와 하수처리장 건설은 요원했다. 응급조치로 강중폭기조(간이정화시설)를 서호 상류에 설치했으나 오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원시민들은 불만이 쌓이게 됐다.

당시 서호개방을 처음으로 들고 나와 행동에 나선 사람은 1987년 수원문화원장으로 취임한 심재덕이었다.

심 원장은 수원천 살리기에 앞장서는 한편 서호를 수원시민에게 돌려주자는 캠페인도 함께 전개했다. 1988년 ‘수원사랑’ 10월호에 죽음의 호수로 변한 서호를 알리는 글을 써서 시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때부터 심재덕 문화원장은 서호를 시민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김준혁 한신대 교수가 쓴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1990년 서호 주변 서둔동 주민들은 농촌진흥청을 상대로 서호를 개방하라는 요구를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농촌진흥청은 움직이지 않았다. 심 원장은 1992년 7월 9일 경인일보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첫째, 항미정은 잘 보존되고 있는가? 옛 선현들이 주변과 조화를 이뤄 건축했는데 항미정 옆 동산은 왜 깎여 없어졌는가?

둘째, 서호의 수면은 옛날과 같은 모습인가? 여기산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서쪽의 활처럼 휘여 아름답던 그곳에 직선 운동장이 된 것은 어떤 연유인가?

셋째, 위의 두 가지 형질변경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넷째, 서호의 축만교는 무엇인가? 일본인조차 항미정과 여기산을 생각해 아담하고 예쁜 다리를 놓았는데 경관을 무시하고 거대한 콘크리트 다리를 건설한 것은 누구의 의견을 듣고 한 것인가?

다섯째, 서호를 살릴 것인가? 금빛잉어, 가물치, 온갖 물고기가 노닐 던 서호는 사호(死湖)가 됐다.

화산지하차도 수해복구 현장. 임창열 경기도지사, 심재덕 수원시장, 박종희 국회의원, 수원시와 경기도 간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당시 수원시는 집중폭우 때 서호천 주변의 침수피해가 극심하게 발생했다. 서호의 수문을 농촌진흥청에서 관리했기에 수원시와 손발이 맞지 않아 수위조절을 제때 하지 않아 수위가 높아져 침수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수원시는 서호 관리권한을 수원시에 위임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서호는 농사시험 사업에 필요한 관개용수로 활용하기 때문에 관리권을 넘겨줄 수 없다는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1995년 7월 1일 제1기 민선시장으로 당선된 심재덕 시장은 문화원장 시절 추진한 서호 개방 사업을 추진했다. 서호 개방을 위해서는 수질개선이 급선무였기에 호수 바닥에 쌓인 오염토사 준설공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상류에 설치된 강중폭기조(정화시설)를 철거하고 공원조성을 추진했다.

화성축성 200주년 세계연날리기 행사 모습. 서호를 메워 조성한 잔디운동장에서 연날리기 행사가 개최됐다. (사진=수원시)

1996년은 수원화성 축성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전인 1994년 7월 29일 당시 심재덕 문화원장은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제안한 바 있다. 기념사업 일환으로 국제연날리기 행사를 농촌진흥청 운동장에서 개최함으로써 서호개방 시민운동 사업을 마무리 했다. 이 운동장은 서호를 메워 만든 것이었다.

축만제는 2016년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로부터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가뭄에 대비한 구휼 대책과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과 재원을 제공하는 등 백성의 식량 생산과 생계에 기여했고, 화성이라는 신도시 건설의 하나로 조성한다는 아이디어가 혁신적이었고, 항미정 건립으로 관개용수 공급의 단일 목적을 넘어 조선후기 선비들의 풍류와 전통을 즐기는 장소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봄철 서호 풍경. 서호주변에 벚꽃이 만개하여 서호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정조의 애민사상에서 비롯된 농업기반 시설은 우리나라 농업의 본산이 됐다. 나아가 쌀 생산 3천 만석을 달성해 쌀 분야의 자급을 이루었다.

2014년 농촌진흥청은 비록 수원을 떠났지만 정조시대 이후 대한민국의 농업의 본산지임을 잘 지켜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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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4)] 만석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 |김충영의현미경

2023-02-0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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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4)] 만석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2.06 06:00

만석공원 조성계획도. 광장, 다목적운동장, 축구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배드민턴장, 족구장, X-게임장, 주차장, 화장실, 정자, 영화정, 어린이도서관, 미술관, 야외음악당, 청솔노인복지관, 기념비, 생태학습장, 수변데크 등이 조성됐다. (자료=수원시)

‘만석공원’은 1795년 5월 18일 완성된 ‘만석거’에서 유래했다.

1794년(정조18)11월 1일 정조는 흉년으로 곤궁한 백성을 염려해 해동기까지 성역 중지를 선언하고 화성 인근에 저수지와 농지개간을 지시했다. “그렇게 하면 10년 후에는 수확이 만 섬(萬石)에 달할 것이니 이것은 ’만 명‘이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다. 이는 성을 지키는데 일조(一助)가 되리라”고 했다.

1795년(정조19년) 윤2월 14일 원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정조는 화성유수 조심태로부터 개간이 가능한 땅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곧 작업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공사는 1795년 3월 1일 진목천의 물줄기를 막는 공사를 시작으로 5월 18일 완성했다. 정조는 1796년(정조20) 1월 원행 때 ‘만석거(萬石渠)’로 명명했다.

영화정도. 만석거를 감싸고 있는 옆의 길이 만석거 제방 겸 원행길이다. 북쪽에 영화정이 있고, 만석거 표석이 세워져 있다. 만석거에는 놀이배 2척이 있고, 남쪽으로 여의교가 위치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 권수에 수록된 그림이다. (자료=수원시)

만석거는 둘레 1022보로써 주변에 101석(石) 5승락(升落:되지기, 마지기의 10분의 1이다.)의 대유둔이 조성됐다. 만석거는 폭우에 대비해 수위를 조절하는 수문(水門)과 둔전 관개(灌漑)에 필요한 수갑(水閘)을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주변에 송림지대를 조성하여 유락시설로 이용되도록 했다.

연못에는 작은 섬을 두어 꽃나무를 심고 연꽃을 심었으며, 연못가에 영화정(迎華亭)을 세워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1796년 10월 16일 낙성연때는 연못에 배를 띠우고 연회를 갖기도 했다.

1925년 7월 ‘을축대홍수’때 제방이 유실되자 제방으로부터 400m 상류지점에 제방을 새로이 축조하여 오늘날의 저수지가 됐다. 만석거는 일왕면에 있다하여 일왕저수지로 불리기도 했으며, 조기정 방죽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5년 7월 1일 민선 1기 심재덕 시장은 공원이 완성되자 옛 이름을 취해 ‘만석거’, ‘만석공원’으로 바로 잡았다.

만석거가 공원이 된 것은 1967년 7월 3일이다. 정부수립 후 최초로 수립한 도시계획에서 ‘제4호공원’으로 32만9004㎡가 지정됐다. 공원조성은 1992년 들어서 추진됐다. 공원으로 지정 된지 25년이 지나도록 공원조성이 이뤄지지 않아 여러 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1990년 1월 항공사진. 만석공원 개발전 사진이다. 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으로 가옥이 많이 보인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첫째는 1990년대까지 서호천 유역이 침수피해가 많았다. 서호 여수토(물넘이뚝) 제방과 만석거 여수토 제방이 높아 집중 호우 시 침수 피해가 자주 발생했다.

두 번째는 저수지를 제외하고 전·답과 임야로 형성된 60%이상의 토지가 사유지여서 보상을 요구하는 민원이 발생했다.

세 번째는 파송1·2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시행으로 거주민이 많아지자 오수가 저수지에 유입돼 심각한 악취가 발생했다.

네 번째는 북수원권 주민들의 여가와 휴식공간 제공을 위해 공원조성이 필요했다.

1988년 7월 1일 구제(區制)가 도입되면서 공원업무는 도시과 도시정비계에서 담당했다. 1992년 8월 21일 필자는 구획정리계장에서 도시계획계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이윤희 도시정비계장이 건설과 도로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양원 하수계장(전 수원시 건설국장)이 도시정비계장으로 발령받았다. 주 계장은 이미 하수계장시절 서호천 침수대책사업을 추진했다.

주 계장은 일왕저수지(만석거)에 대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수원시 ‘제4호공원 조성사업’추진계획을 수립하여 가장 먼저 침수대책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이어 공원조성계획을 수립하게 됐는데, 당시는 김포 쓰레기 매립장이 조성되지 않은 시기여서 각 시.군은 자체적으로 생활쓰레기를 처리했다. 수원시는 구릉지대가 없어 쓰레기 처리에 많은 애로가 있었다. 문제는 만석거 제방아래 부분 논에 쓰레기를 매립했던 것이다.

주 계장은 그곳이 1796년 만석거 조성당시 원래 저수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원팔경의 하나인 북지상련(北池賞蓮)을 복원해 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예산이 많이 들어가서 제방 아래 부분의 쓰레기 처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수원시 청소부서의 의견에 따라 그곳에 운동장을 조성하는 계획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대안으로 북지상련(北池賞蓮)표석을 세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22년 6월 항공사진. 만석공원이 완성된 모습이다. 왼쪽 숲은 예산부족으로 조성하지 못한 것이 현재까지도 숲으로 남아 있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공원조성계획에서 중점을 둔 것은 테니스장이었다. 체육부서에서는 전국단위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14면을 확보해야 했다. 광장, 다목적운동장, 축구장, 배드민턴장, 게이트볼장, 족구장, X-게임장, 주차장, 화장실, 정자, 영화정, 어린이도서관, 미술관, 야외음악당, 청솔노인복지관, 기념비, 생태학습장, 수변데크 등이 조성됐다. 배드민턴장은 이후 실내경기장으로 재조성됐다.

문제는 32만9004㎡(9만9523평)의 공원부지 중 수원시 땅이 없다는 것이었다. 수원시의 예산형편으론 1년에 20억~30억원씩 확보할 경우 10년 이상 걸려야 했다. 주 계장은 사업추진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해마다 확보되는 예산은 저수지 밖의 토지 보상에 집중했다. 저수지는 수화농지개량조합(현 농어촌공사)소유였으므로 사용동의를 얻어 공원 조성을 추진했다. 수원시는 수화농지개량조합에 보상금을 바로 지급하지 못해 빚 독촉을 받아야 했다.

수원미술전시관 전경. 수원화성의 한옥 지붕처마를 표현한 건축물이다. 재활용센터로 지어진 건물이 수원미술전시관으로 활용됨으로써 미술관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은 미술관이다. (사진=수원시포토뱅크)

공사가 절반정도 추진될 즈음인 1995년 7월 1일 심재덕 시장 취임으로 많은 부분 조성계획을 수정했다. 만석공원이 이목동의 집에서 출퇴근 길옆에, 멋진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보게 됐다. 건물의 용도를 확인해보니 청소과에서 재활용센터를 짓고 있음을 알게 됐다.

당시 수원시 미술인들은 미술전시관 건립을 당면사항으로 정하고 심 시장에게 지속적으로 주문했다. 심 시장은 당시 설계자인 진우건축 김동훈 건축사에게 미술관으로 사용할 수 없냐고 하여 미술관으로 사용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 건물은 결국 ‘재활용센터’가 되지 못하고 ‘수원미술전시관’이 됐다.

공원조성계획도 바뀌었다. 당시만 해도 남수문 복원은 요원했다. 그래서 상류지역에 남수문 형상의 교량 설치를 주문했다. 함께 영화정 역시 복원을 주문했다. 만석공원조성이 완공되자 주양원 계장은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장안구 건설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선 심재덕 시장은 이 무렵 수원시목을 은행나무에서 소나무로 바꾸게 된다. 당시 장안구청장은 심재덕 시장과 수원농림고등학교 동창인 김영철 구청장이었다. 김 구청장은 만석공원과 능행길 등에 시목인 소나무 식재를 적극 추진했다. 만석공원은 시민들의 기증 목으로 추진하는 식재 계획을 수립했다.

공원 외곽에 200주를 심기로 했다. 나무의 규격은 높이 10m 크기로 1주당 80만원으로 책정했다. 대신 화강석으로 팻말을 세워주는 조건으로 계획을 세웠다. 기증자들에게는 회갑, 칠순, 개업, 자녀출산 등 경사스런 기념일에 맞추어 기념식수 의미를 부여했다.

후일 담당자들은 상급기관으로부터 호된 감사를 받았다고 한다.

만석거 연꽃심기 행사 기념사진. 화성연구회 김이환 초대 이사장과 회원 15명이 함께 참여했다. (사진=수원시포토뱅크)

만석공원 조성이 완료되자 북지상련(北池賞蓮)이 사라짐을 아쉬워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2000년 4월 16일 용주사 포교당인 수원사가 주관, 수원의 문화단체가 참여하는 연꽃심기 행사가 열렸다. 필자도 화성연구회 회원 15명과 함께 참여했다. 현재 만석공원의 연꽃은 이때 심은 연꽃이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만석공원에는 수원발전을 위해 헌신한 7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병희 전 무임소장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2000년 5월 19일 이병희 선생 동상건립 추진위원회가 세워 고인의 수원사랑 뜻을 기리고 있다.

만석거는 2017년 10월 11일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가 지정한 '세계 관개(灌漑)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 만석거는 수갑(水閘)이라는 조선 시대 최고의 수리기술이 반영된 당대 선도적 구조물이고, 백성들의 식량 생산과 농촌 번영에 이바지했으며, 건설 당시 아이디어가 혁신적이고, 가을 풍경이 수원 추팔경(秋八景)의 하나로 불릴 정도로 역사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만석공원은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대왕의 애민의 정신이 서려있는 공원이다. 북수원권 시민들의 여가와 휴식공원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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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3)] 인계 제3호, 청소년문화 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 |김충영의현미경

2023-01-24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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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3)] 인계 제3호, 청소년문화 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1.23 04:55

인계제3호, 청소년문화공원 조성계획도. 중앙부분이 청소년문화회관, 아래 원형은 다목적 광장, 상단 왼쪽부분은 56년 동안 조성되지 못한 숲, 오른쪽 역시 미조성 됐으나 사각부분을 공원을 축소하고 매화초등학교를 지었다. (자료=수원시)

‘인계 제3호 공원’은 수원의 중심에서 동남쪽에 자리 잡은 인계리에 위치했다. 솔숲과 전답, 딸기 밭, 화분공장과 1956년에 자리 잡은 수원송신소 진입로가 지나가는 농촌마을이었다. 1967년 7월 3일 정부수립 후 우리 손으로 수립한 최초의 도시계획에서 인계동 300번지 일원 32만1200㎡가 공원으로 지정됐다.

이 마을엔 작은 동산 3곳이 있었다. 6.25 전쟁 이후 정부시책에 발맞춰 사방사업으로 숲을 조성한 곳이다. 수원시는 숲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공원으로 지정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50년이 넘게 정신적으로나 재산상으로나 큰 피해를 입었다.

1961년 11월 항공사진. 3곳의 숲과 가운데로 송신소 진입도로가 보인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이 때 공원이 된 토지는 인근의 상업지역이나 주거지역에 비해 1/5밖에 안 되는 가격이었다. 남보다 고생해 숲을 조성했지만 불이익을 받은 것이다.

필자가 도시계획과장 때였다. 지인이 찾아왔는데 ‘인계 제3호 공원’에 편입된 땅이 경매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 땅을 경매 받으면 언제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와 보상금액은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가격은 감정평가 금액으로 보상이 되고, 보상 시기는 알 수 없다고 일러주었다. 그는 포기하고 말았다.

공원에 편입된 토지가 경매에 나와 있음을 녹지공원과에 알려주었다. 녹지공원과는 그때 1000여 평의 토지를 경매를 통해서 감정가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낙찰을 받았다. 이 땅이 공원으로 지정되지 않았으면 경매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담당직원은 수원시의 예산을 절약했다하여 성과급을 받기도 했다.

1986년 12월 3일 도시계획도. 청소년문화공원을 관통하는 35m도로가 계획됐다. (자료=수원시)

1980년대 들어서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동수원 개발 사업이 추진됐다. 1986년 12월 3일 도시계획에서 시청역사거리에서 ‘인계 제3호공원’ 중앙을 관통하는 폭 35m의 도로계획이 결정됐다. 이후 월드컵경기 개최를 위해 월드컵경기장 건설이 추진됐다. 월드컵 경기장 진입로를 동수원IC에서 월드컵경기장을 거쳐 청소년문화센터 앞을 연결하는 도로를 1996년 11월 18일 결정해 개설함에 따라 ‘인계 제3호 공원’을 통과하는 도로는 수원의 중심도로가 됐다.

매화초등학교를 건립하기 전·후 공원모습.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이 무렵 인계동, 매탄동지역에는 초등학교가 부족했다. 학부모들이 항의하자 수원시교육청은 수원시에 초등학교부지 선정을 요청했다. 당시 심재덕 시장은 학교를 지을 만한 나대지가 없자 보상을 하지 않은 공원일부를 해제 지시했다. 매화초등학교는 공원부지 60%, 민가 40%를 편입하는 조건으로 학교 부지를 선정, 2005년 3월 1일 문을 열었다.

1991년 12월 31일 정부는 청소년들의 건전한 학교 밖 생활환경 조성을 위해 청소년기본법을 제정했다. 이즈음 경기도는 수원시로 하여금 청소년시설 건립 지침을 시달했다. 수원시는 청소년시설을 ‘인계 제3호공원’에 건립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1990년대까지 수원시에는 청소년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공원을 담당하는 도시과 이윤희 도시정비계장이 담당하게 됐다. 이 계장은 수원시 청소년 수련시설 추진계획을 수립했는데, 청소년기본법에서 정하는 시설기준을 지켜야 했다.

청소년기본법상 청소년시설은 청소년수련관, 청소년수련원, 청소년문화의집, 청소년특화시설, 청소년야영장, 유스호스텔 등으로 분류됐다. 수원시는 최초로 청소년 시설을 건립하는 것이므로 종합기능을 가진 청소년수련관을 건립하고자 했다. 경기도의 지침은 연면적 6600㎡(2200평) 크기의 수련시설을 권장했다.

수원시는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청소년종합수련관을 구상했다. 지침의 2.4배가 넘는 청소년종합수련관 계획을 수립하자 경기도는 반대하고 나섰다. 수원시는 당시까지 정규규격의 수영장이 없었다. 공연장 또한 경기도문화예술회관 뿐이었다. 체육관 역시 수원체육관 밖에 없어 일반시민이 사용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청소년 전용 공간이 없었다. 청소년과 일반시민이 함께 이용하는 대규모의 수원청소년문화센터로 격상하여 건립해야하는 당위성을 설득했다.

1999년 완공된 청소년문화센터 모습. 전면중앙에 연수동, 오른쪽에 온누리아트홀, 뒤편에 꿈의 체육관, 왼쪽에 새천년 수영장, 전면에 광장과 주차장이 조성되고 있다. (사진=수원시포토뱅크)

수원시 청소년문화센터는 ‘인계 제3호공원' 23만9696㎡(7만2508평)중 35m 도로변에 접한 5만5661㎡(1만6837평)을 청소년문화센터 부지로 정했다. 추진계획이 수립되자 작품공모에 들어갔는데 공모결과 당선자는 진우건축 김동훈 건축사였다.

건축계획은 기능별로 4개 영역으로 설계됐다. 중심에는 청소년들의 활동 및 연수기능과 업무기능을 담당하는 연수동 4699㎡(1421평)를 배치했다. 공연장 온누리아트홀은 525석 규모 4501㎡(1361평)을 설치했다. 수영장은 50m 10레인을 설치했다. 그리고 다목적체육관을 3173㎡(960평)을 설치해 청소년들의 체육활동 공간을 제공했다.

수원청소년문화센터는 1993년 시작하여 7년이 지난 2000년에 들어서 개관했다. 1990년대 중반 수원시는 인구 70만 명이 넘는 도시였으나 예산은 항상 부족해 200억원이 들어가는 청소년문화센터를 1년에 30억원 밖에 투자하지 못해 7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2002년 7월 1일 김용서 시장이 제24대 수원시장으로 취임했다. 김 시장은 드라마센터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청소년문화센터가 1999년 말 준공돼 2000년 1월 26일 개관하자 미조성된 서측부분을 조성할 시점이었다.

수원시 간부들이 일제 강점기 거리 오픈세트장을 견학하고 있다. (사진=수원시포토뱅크)

또한 KBS(한국방송공사)는 1986년 5월 27일 인계동 468번지 일원의 수원송신소 부지 2만여 평과 외곽에 3만여 평을 추가로 매입해 5만평 부지에 드라마제작센터를 조성했다. 이 무렵 드라마제작센터는 일제 강점기 거리 오픈세트장을 조성해 관광객들에게 개방했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 드라마제작센터가 수원에 자리잡는데 필요한 도시계획 절차이행과 용지보상 등의 업무를 담당했었다.

김용서 시장은 드라마제작센터와 일제 강점기 거리가 조성됨에 따라 인계 제3호공원에 방송테마파크를 조성할 것을 KBS에 제안했다. 수원화성과 연계하면 관광도시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KBS 박권상 사장이 수원시와 협력 사업에 동의함에 따라 양 기관은 2002년 11월 참여 의향서를 교환했다. 그러나 2003년 4월 28일 인사 개편으로 정연주 사장이 취임함에 따라 방송테마파크 사업은 백지화 되고 말았다.

수원시는 2009년 2월 ‘청소년문화공원’ 조성사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개발방향은 4개의 주제가 있는 공원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첫 번째는 청소년문화센터 6만1450㎡(1만 8588평)을 중심으로 서측 KBS 수원방송센터 뒤편에는 9만7000㎡(2만9342평)에는 ‘청소년 문화테마 공원’을, 북측방향 동수원병원 맞은편 3만4585㎡(1만462평)에는 ‘전통테마 공원’을, 동측인 매화초등학교 뒤편 4만8055㎡(1만4536평)에는 ‘운동테마 공원’을 조성하는 계획이 수립됐다.

먼저 1단계로 ‘청소년문화 주제공원’은 2009년 3월 착공했다. 공원조성사업은 다목적광장과 잔디광장, 산책로, 자전거도로, 포토존, 북가든, 바닥분수, 12별자리 등주, 각종 수목식재 사업을 38억7100만원을 투자해 2010년 12월에 완료했다.

수원시는 2012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제2회 경기정원박람회를 서호공원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조시대 조성한 축만제(서호)가 2005년 10월에 경기도기념물 제200호로 지정되자 주변이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공원조성계획을 변경할 경우 문화재심의위원회 심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경기정원박람회장 공원모습. (사진=수원시포토뱅크)

수원시는 정원박람회 개최지를 청소년문화공원으로 변경해 개최했다. 전시공간의 구성은 전문가가 참여하는 모델정원, 시민·기업이 참여하는 시민정원, 대학생이 참여하는 실험정원이 들어섰고, 판매 및 홍보 공간, 이벤트 공간으로 조성했다.

필자는 2013년 3월 공직을 마치고 ‘수원시 청소년 육성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청소년문화센터는 청소년과 일반시민이 활용하는 공연장과 수영장, 야외공연장이 있어 큰 행사가 수시로 개최됐다. 특히 주차요금제를 시행하지 않아 외지로 관광을 떠나는 여행객들의 출발지가 됨에 따라 주차장이 부족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2022년 6월 인계제3호, 청소년문화공원 모습.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필자는 도시계획, 도로교통, 화성사업 등을 담당했던 경험으로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됐다. 청소년문화센터 104면 주차장과 청소년문화공원 197면 주차장을 통합해 301면을 단일 주차장으로 운영하는 방안이었다.

이를 위해 연결도로를 만들고 주차요금소를 설치하는데 사업비가 5억원이 들어야 했다. 이 사업의 필요성을 공감한 사람은 당시 수원시 이필근 기획예산과장(전 권선구청장, 전 경기도의원)이었다. 이 사업으로 청소년문화센터의 주차문제는 말끔히 해소됐다.

지난 2022년은 경기도 정원박람회를 개최한 지 10주년을 맞았다. 오기영 수원시 녹지공원사업소장은 노후화된 공원시설물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간담회를 개최해 시설물을 보완한다고 한다. 아무쪼록 청소년문화공원을 잘 정비해 청소년문화공원의 역할을 다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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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2)] 효원공원을 조성한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 |김충영의현미경

2023-01-0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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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2)] 효원공원을 조성한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1.09 05:10수정 2023.01.09 09:22

효원공원입구 상징조형물. 서북공심돈을 형상화했다. 공원명은 소형 양근웅선생이 썼다. (사진=김충영 필자)

1967년 7월 3일 수립한 도시계획에서 3만9500㎡가 ‘인계 제2호 공원’으로 결정됐다. 이후 공원부지는 1980년에 수립한 ‘수원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구상(안)에서 중심상업지역으로 계획됐다. 이어 추진된 20년 단위의 ‘2001년 수원시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건설부(국토교통부 전신)는 중심사업지역이 수원시의 여건에 비해 너무 넓다고 축소를 주문했다. 당시 최영길 도시과장은 건설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심상업지역을 축소하여 공원을 계획했다.

이때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을 추진한 한국토지공사가 권선지구 인접지인 매탄1택지개발지구의 사업 참여를 요청했다. 수원시는 ‘2001년 도시기본계획’이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인계 제2호 공원’을 ‘매탄1택사업지구’에 편입하여 개발할 것을 주문했다.

한국토지개발공사는 수원시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공원조성은 수원시가 추진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토지공사와 수원시의 합의로 ‘인계 제2호 공원’은 3만9500㎡(1만1950평)에서 22만5826㎡(6만8312평)로 확장됐다. ‘매탄1택지개발사업’은 1984년 4월 11일 지구로 지정돼 1988년 9월 26일 사업이 완료됨에 따라 ‘인계 제2호 공원’은 수원시에 인계됐다.

이 과정에서 제일 먼저 추진된 사업은 수원시문화예술회관(현 경기아트센터)이었다. 시청 옆 의회부지에 건립하기로 했던 계획이 부지가 협소해 올림픽공원으로 위치를 바꿔 추진했으나 도시공원법의 부적합으로 불가피하게 ‘인계 제2호 공원’으로 위치를 바꿔야 했다. 문화예술회관 건립을 추지하던 1985년에는 매탄1택지개발사업이 미 준공돼 수원시에 이관 되지 않아 문화회관 건축허가 때는 한국토지공사로 부터 토지 사용동의를 얻어야 했다.

‘인계 제2호 공원’이 ‘효원공원’이 된 것은 이윤희 도시과 도시정비계장(전 삼호아트센터 이사장) 때문이었다. 당시 수원시 도시과는 도시행정계, 도시계획계, 구획정리계, 도시정비계가 있었다. 필자는 1988년 7월 1일 도시계획계 차석에서 구획정리계장으로 승진했고, 1992년 8월 21일에는 도시계획계장으로 자리를 옮겨 1994년 8월 21일 까지 도시과에서 9년을 근무했다.

1988년 7월 1일 수원공업고등학교 동창인 이윤희 계장이 건설과 도로보수계장에서 도시과 도시정비계장으로 자리를 옮겨 필자와 함께 근무하게 됐다. 도시정비계에서는 개발행위허가와 공원조성업무를 담당했다. 1990년 수원시 인구는 64만5000명의 도시였으나 번듯한 공원하나 없는 도시였다.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어린이 공원 부지를 확보 했으나 제대로 조성하지 않아 수목 몇 그루와 놀이기구 몇 점이 고작이었다. 대부분의 공원은 공지나 다름없었다.

1990년 1월 항공사진. 경기도문화예술회관만 먼저 건설되고 뒤편 효원공원은 임야와 논과 밭의 모습이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이윤희 계장은 ‘인계 제2호 공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88년 매탄1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준공돼 6만평의 공원부지를 인계 받았기 때문이다. 공원부지는 임야와 밭이어서 공원조성을 하지 않을 경우 부지런한 주민들의 텃밭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계 제2호 공원’을 어떤 주제로 조성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나라사랑'을 주제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옆에 있는 필자와 당시 김재기 과장에게 의견을 구했다. 나라사랑을 테마로 한다는 것은 무궁화동산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무궁화를 알기 위해서 서울농대 화훼과 등을 찾아다니면서 무궁화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결론은 무궁화동산을 만들만큼 수종이 다양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수원의 정체성인 효를 상징하는 ‘효원공원’을 조성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는 건설과 도로보수계장 시절 지지대 고개 시 경계에 ‘효원의 도시 수원’이라는 표지판을 세울 만큼 수원의 정체성인 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효와 관련된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수원의 효에 대해서 연구해야 했다.

그는 ‘인계 제2호 공원’ 조성 추진계획서를 작성, 당시 이호선 시장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이 시장은 적극 지지해주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민선시대를 열기 위해 1991년 지방의회가 먼저 출범한 상태였다. 다음 지방선거 때인 1995년 7월 1일에는 민선지자체장의 출범이 결정된 상태였다. 이호선 시장은 민선 수원시장에 도전하기 위해 수원시장으로 부임했다는 후문이 돌기도 했다.

민선 수원시장에 꿈이 있던 이호선 시장은 이 계장의 계획(안)을 적극 지지했다. 이 계장은 공원조성계획을 직접 디자인해서 시장에게 보고했다. 효를 주제로 테마공원을 만드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 계장의 의견을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이론적인 연구와 기본계획이 필요했다.

‘효원공원 연출기본계획 및 실시설계’를 경희대학교 부설 조경계획연구소 안봉원 소장이 맡게 됐다. 1992년 초부터 계획 및 실시설계가 시작돼 1992년 12월에 용역이 완료됐다.

‘효원공원’은 ‘인계 제2호 공원’ 전체 면적 22만5826㎡(68,312평)중 문화예술회관부지와 도로 남쪽의 공원부지를 제외한 7만8000㎡(2만3000평)을 효원공원으로 계획했다.

효원공원의 기본방향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는 효의 내용을 교육적인 주제를 선정해 이야기 형식의 시나리오로 연출한다. 둘째, 가정의 중요성 및 가족관계에서 효의 필연성을 주제로 연출한다. 셋째, 어린이 및 청소년을 대상으로 효의 필요성과 부모의 정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연출한다. 넷째, 가정생활과 밀접한 주제를 연출한다. 다섯째, 전통적인 효 관련이야기를 연출한다.

효원공원 전경. 2012년 3월 9일 이용창 사진작가가 헬기에서 촬영했다. 광장 가운데 어머니상의 조각과 산책로를 따라 조형물이 배치됐다. 왼쪽 상단부에는 월화원이 조성되기 전 모습이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설치 조형물은 효원공원 건립 취지문비 1점, 효 권장 시비 5점, 조각품 4점, 효원공원 입구 상징조형물4점, 심청전 도자부조 1점 등 모두 15점이 계획됐다. ‘효원공원 건립 취지문비’는 소형 양근웅 선생의 글을 새겨 세웠다.

효원공원에 5점의 효 권장 시비를 세웠다. 첫째 작품은 양주동 선생의 '어머니 마음' 시비를 서예가 양은진 선생의 글씨로 새겨 세웠다. 두 번째는 정철의 ‘훈민가’ 중에서 효 권장 내용을 도양 김병학 선생의 글씨를 새겨 세웠다. 세 번째는 명심보감 효행편의 효자비를 동주 이한산 선생의 글씨로 새겨 세웠다. 네 번째는 정조대왕 효 어록비를 세웠다. 다섯 번째는 ‘효는 백행의 근본’ 시비를 한갑수 선생의 글씨로 새겨 세웠다.

심청전 슈퍼 그래픽 도자부조 작품. 길이 50m, 높이 2.4m의 옹벽에 서울산업대학교 도예학과 이기원 교수가 제작 설치했다. (사진=김충영 필자)

조각 작품은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위대한 탄생, 심청전 도자부조 작품으로 설치됐다. 심청전 내용을 10개 주제로 구성해 길이 50m, 높이 2.4m의 옹벽에 설치했다. 효원공원의 조각 작품은 서울산업대학교 도예학과 이기원 교수의 작품이 설치됐다.

광장에 조성된 어머니상 조각작품.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효원공원 중앙에 6층의 원형 단 위에 어머니상을 설치했다. 어머니 상은 효원공원 광장 중앙에 설치했는데 공원과의 부조화 의견에 따라 공원재편 과정에서 이전 설치됐다. 효원공원 출입구 양쪽에 서북공심돈을 상징하는 조형물 4점이 설치됐다. 상징조형물에 ‘효원공원’명을 소형 양근웅 선생의 글을 새겼다.

효원공원은 경기아트센터(전 경기도문화예술회관)를 시작으로 1994년에 조성됐고, 1995년 11월에는 삼성전자가 부담해 수원 야외음악당이 조성됐다. 2005년에는 화성 내 매향동에 있던 수원시 현충탑 부지가 협소함에 따라 효원공원 남쪽에 새로이 조성됐다.

2020년 5월 효원공원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효원공원에는 매탄파출소(현 매탄지구대), 민방위교육장, 경기도 자유총연맹, 편의시설인 식당동이 들어섰다. 제일 늦게는 월화원이 들어섰다. 월화원은 경기도와 중국 광동성이 자매결연을 맺게 됨에 따라 우정의 상징으로 조성된 중국전통정원이다. 경비는 광동성이 부담했다.

효원공원에는 각기 다른 9개의 시설이 들어섰다. 필자는 1980년대 도시계획 실무자 시절 매탄파출소(현 매탄지구대)와 자유총연맹, 민방위교육장 등 입지 반대 의견을 제시했지만 적합한 부지 마련이 어려웠고 시급성을 감안해 이 시설들이 들어섰다.

아무튼 효원공원은 동수원의 중심공원이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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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1)] 수원 올림픽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 |김충영의현미경

2022-12-2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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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1)] 수원 올림픽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입력 2022.12.26 05:40

올림픽공원비. 서예가 이수덕씨의 글을 자연석에 새겨 1988년 세웠다. (사진=김충영 필자)

일제강점기인 1944년 수원최초의 도시계획에서 북공원, 동공원, 팔달산공원, 세류공원, 동산동원 등이 지정됐다.

1949년 8월 15일 수원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본격적인 도시개발을 추진해야 했으나 1950년 6.25의 발발로 중단됐다.

이후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 무렵인 1961년 우리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추진한 도시계획은 행정미숙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1963년 12월 10일 경기도청 수원이전이 확정되자 도청소재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시계획이 다시 추진됐다.

이 시기 박정희 정부는 산림녹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광교산과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과 수원에 산재한 마을 뒷동산 역시 사방사업을 시행, 숲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 때 상권선의 마을 뒷동산에 리기다소나무 숲이 조성됐다.

경기도청 수원 이전이 1967년 6월 23일로 가까워지자 도시계획은 속도를 내어 1967년 7월 3일 우리 정부에 의한 수원시 최초의 도시계획이 수립됐다. 이때 도시 전반의 내용이 도시계획에 반영됐다.

1944년 일제강점기에 지정된 5개소의 공원이 받아들여졌고, 신규 공원 12개소가 추가 지정됐다. 이때 공원에 편입된 곳은 화성축성 때 조성된 저수지와 성돌을 채취한 산과 일제강점기 축조된 저수지, 사방사업으로 형성된 양호한 임상 등이다. 올림픽공원(인계제1호공원) 역시 이 때 공원이 됐다.

인계동과 권선동 모습. 1974년 8월 항공사진이다. 가운데 둥근 모습의 길이 마라톤코스였다. 윗 부분에 수원공고와 인계초등학교가 보인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올림픽공원은 1980년 5월 29일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가 지정될 때까지 13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그곳은 필자가 수원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1971년 3월 2일 당시까지 여느 시골이나 다름없는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다.

이곳은 필자의 학교 체육대회 때 상권선 마을 소나무 숲을 돌아오는 마라톤코스였다.

그곳이 반환점이어서 학교에서 출발해 인계초등학교를 지나 논길을 달려본 추억이 있다. 고교시절 태권도부 활동을 했다. 당시 방학 때면 인계동 화랑체육관에서 태권도 수련을 했다. 이 때 짓궂은 친구들이 앞장서서 복숭아 서리, 참외 서리를 함께한 추억이 있다.

필자는 1980년에 2001년 목표의 ‘수원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수립을 담당했다. 그리고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 개발계획’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1983년 8월 20일 토목8급에서 토목7급으로 승진해서 도시과 도시계획계에서 건설과 하수계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1984년 문화관광부는 도 단위 문화예술회관 건립 지침을 시달했다.

경기아트센터(경기도문화예술회관) 조감도. (사진=김충영 필자)

경기도는 도청소재지인 수원시에 문화예술회관 건립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수원문화예술회관 업무가 건설과로 배당됐는데 당시 하수계의 업무가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당시 이유하 건설과장은 담당업무를 필자에게 배당했다. 필자가 문화회관 업무를 맡게 된 사유는 도시계획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해서 법제 업무에 능하다는 이유였다.

수원문화예술회관의 최초의 부지는 수원에서 흔히 의회부지라고 불리던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체비지가 결정됐다. 설계공모 후 작품심사 과정에서 부지가 협소하다는 의견이 제시됨에 따라 더 넓은 부지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결정된 곳이 시청 앞의 인계제1호공원(올림픽공원)이 선정 됐다.

설계자가 선정되면서 수원문화예술회관 실시설계가 진행됐다. 설계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자 건축허가를 받기위해 서류검토에 들어갔다. 도시공원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착오가 발견됐다. 도시공원법에는 건폐율이 대지면적의 10%를 넘을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인계제1호공원(올림픽공원)은 5만8454㎡(1만7682평)였다. 도시공원법상 건축물의 바닥 면적이 5845㎡(1768평)가 최대 규모였다. 그런데 수원문화예술회관의 건축면적은 8,817㎡(2667평), 건축연면적은 2만2000㎡(6655평)여서 건폐율을 넘어서는 규모였다.

이를 숨기고 계속 진행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필자는 도시계획을 오랫동안 담당했던 터라 수원의 도시계획 진행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권선토지구획정리 사업지구 바로 옆 단지를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인계제2호공원(효원공원)을 매탄1택지개발사업 지구에 포함하여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필자는 그간의 문제점을 보고하고 대안으로 효원공원에 문화회관을 건립할 수 있음을 보고하자 당시 계장, 과장, 국장, 부시장, 시장은 크게 나무라지 않고 매탄1택지개발지구 효원공원으로 위치 변경을 허락해줘 큰 무리 없이 위치 변경을 추진할 수 있었다.

수원시는 1985년 11월 15일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에 시청사 건립을 추진해 1987년 1월 22일 개청식을 가진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을 시절이었다. 시청이 허허벌판에 들어서자 시청 맞은편에 확보한 인계1호공원 조성이 시급했던 시절 수원 올림픽공원 조성이 추진됐다.

서울올림픽이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서울과 지방에서 개최됐다, 당시 160개국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 열렸다. 88서울올림픽 경기는 23개 경기종목이 개최됐다. 이 때 서울에서 14경기, 경기도에서 8개 종목이 열렸다.

경기도에서 열린 종목은 수원실내체육관 핸드볼, 성남공설운동장 하키, 성남 상무체육관 레슬링, 과천 승마공원 승마, 광주 조정 카누경기장에서 조정과 카누, 고양 파주에서 싸이클 단체전과 개인전, 원당 종합마술경기장에서 승마 경기가 개최됐다.

올림픽공원 착공식 모습. 1987년 4월 18일 시청앞 올림픽공원에서 열렸다. (사진=경기도 멀티미디어)

서울은 1986년 아시안게임에 맞춰 올림픽공원을 조성한 상태였다. 김용래 경기도지사는 경기도에서 8개 종목이 개최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수원에 올림픽공원을 만들 것을 요청해 추진됐다. 수원 올림픽공원은 88올림픽을 준비하던 1987년 4월 18일 시청 앞 인계1호공원에서 착공식이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김용래 경기도지사, 유석보 수원시장, 경기도 단위 기관장, 공무원과 시민이 참석했다.

1990년 1월 올림픽공원 모습.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수원시는 1988년 7월 1일 구(區)제가 도입돼 북쪽에는 장안구, 남쪽에는 권선구가 개청했다. 이 때 필자는 도시과 도시계획계 차석에서 구획정리계장으로 진급해 이미 시작된 올림픽공원 조성사업을 담당했다. 이 때 한상률 토목7급(전 팔달구청장)이 담당해 마무리 했다. 공원에는 화장실 1동, 노인정, 음수대, 주차장 2개소, 배드민턴장, 농구장, 족구장, 테니스장, 씨름장, 산책로, 잔디광장과 수목이 식재됐다.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기념비. 소형 양근웅 선생의 글을 새겼다. (사진=김충영 필자)

88올림픽이 끝나자 ‘올림픽공원’ 공원명비와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 기념비’를 세웠다. ‘올림픽공원’ 공원명 제호는 서예가 소당 이수덕 선생이 썼다.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기념비’는 소형 양근웅 선생이 썼다.

경기도는 1989년 1월 25일 수원올림픽공원에 ‘올림픽기념 조각공원’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작품공모를 통해 16개 작품을 설치했다.

가끔 올림픽공원을 돌아볼 때면 1985년 당시 도시공원법상 건폐율 부족으로 문화회관 건립이 불가함을 알았을 때 절박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문화회관을 올림픽공원에 지었으면 어떠했을까. 올림픽공원이 없는 삭막한 환경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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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99)] 수원은 ‘효원의 도시’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 |김충영의현미경

2022-12-05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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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99)] 수원은 ‘효원의 도시’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입력 2022.12.05 05:20

가칭 화산대효원종합계획 보고서. 제1무임소장관이던 이병희 국회의원이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계획서이다. (자료=수원시)

수원이 ‘효원의 도시’라는 별칭을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효원(孝園)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단어이다. 이는 효(孝)와 전원(田園)을 합성한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수원에서 ‘효원’이라고 표기한 기록은 1973년 ‘수원성곽복원정화계획’이다. 부제를 ‘화산대효원종합계획’ 이라고 적었다. 당시 ‘제1무임소장관 이병희 국회위원’이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결재를 얻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에서 최초로 등장하고 있다. 이 계획서를 작성한 당시 ‘제1무임소장관실 임수복 사무관(전 경기도지사 권한대행)은 수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다 보니 가장 적합한 단어가 ‘효원’이었다고 했다.

이후 ‘효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974년 11월 12일 제13대 수원시장으로 부임한 이재덕 시장이다. 수원화성 복원사업이 1975~1979년 까지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이 시장은 ‘1975년 시정기본목표’를 ‘효원(孝園)의 새수원’이라고 내걸었다. 시정방침은 성실한 봉사, 엄정한 책임, 착실한 결실을 내걸었고, 실시방향은 유신이념의 생활화, 새마을 운동의 가열화, 영세시민 생활의 안정화, 대효원 건설, 도시기반 조성, 등을 내걸었다.

이후 1978년 8월~1980년 5월까지 근무한 제14대 백세현 수원시장 역시 ‘효원의 새 수원’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고 한동민 수원박물관 학예팀장(현 화성박물관장)은 ‘1970~80년대 수원의 변화 “효원의 도시 수원”에서 “활기찬 수원건설” 까지’에서 밝히고 있다.

고려 효자 한림원 학사 최루백 효자비. 화성시 정남면 수기리에 있다. (사진=화성시)

수원이 효원의 도시로 불리게 된 연원을 살펴보면, 수원은 예로부터 효자 · 효부 · 열녀가 많은 고장이었다. 고려시대 최루백(崔婁伯)은 수원 최씨 시조 최상저의 아들로 고려 시대 문신이었다. 조선 세종 14년에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최루백의 행적이 수록돼 있을 정도로 지극한 효자였다.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죽자 그 호랑이를 죽이고 뼈와 살을 거두어 안장한 후,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최루백의 효자비각은 조선 숙종 때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비각을 건립했다.

이고 선생 신도비.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광교 진입로 오른편에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이고(李臯) 선생은 고려말 문신으로 한림학사를 지냈다. 정국이 혼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수원으로 낙향하여 탑산(塔山)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그를 조정에 등용코자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조는 그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려 올리게 했는데 사통팔달해 거칠 것이 없는 아름다운 산이라며 탑산을 팔달산으로 사명(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는 팔달산 자락에 살다가 적사리(赤寺里)로 이사해서 학당을 열어 "착하게 살아라" 즉,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항상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였다. 그는 정성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여막을 지키고 살았다고 한다. 이때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며 효성으로 애통하는 마음이 지극해 피눈물이 그치지 아니하니 마침내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됐다고 한다. 세종 때 마을 입구에 ‘고려효자 한림학사 이고의 비’를 세웠다. 정조는 그가 살던 집터를 효자가 살던 집터라 하여 학사대(學士臺)를 세웠고, 고종은 그가 살던 마을을 권선리(勸善里) 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수원은 정조의 효심으로 현륭원이 조성되고 화성이 건설됐다. 조선시대 왕실의 무덤을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했다. 능은 제왕과 왕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 묘는 왕족이나 일반인의 무덤을 묘라 했다.

99-4, 능원침내금양전도. 1821년에 작성된 건릉지에 삽입된 그림이다. (자료=수원시)

정조는 1752년(영조28)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38)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로부터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보고 11세의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 때 정조는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살려 달라며 할아버지에게 두 손을 빌며 애원했으나 영조는 정조를 쫓아냈다. 영조는 교서를 내려 정조를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시키면서 정조는 더 이상 상복을 입을 수 없었다. 그때 정조의 모습을 두고 ‘슬퍼 우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았다’고 기록했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취임 일성으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를 천명했다. 정조는 비통하게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흉지로 알려지자 1789년 7월 11일(정조13) 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조선 최고의 명당자리인 수원부 읍치 화산으로 이장을 결정했다. 구읍에 있던 319호를 보상을 주어 북쪽의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건설해 이주시켰다.

현륭원의 조성은 1789년 7월 12일부터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7일 천원(遷園, 묘를 옮기다)했다. 그해 가을부터 심기 시작한 나무는 1796년이 돼서야 일단락됐다. 7년간 심은 나무의 숫자와 종류 등의 정리가 필요 했다. 정조는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은 문서를 간략하게 한권으로 정리하도록 명했다.

7년간 식재 상황을 기록한 문서는 만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무 심은 날짜, 나무 심은 사람, 지원하여 나무를 심은 사람, 감독한 사람, 나무를 심은 장소, 나무의 종류, 심은 나무의 수, 나무를 캐온 곳, 나무를 캔 사람, 나무를 운반한 사람, 나무 가격, 지불한 품삯, 포상내역, 포상에 빠진 사람 내역까지 기록했다.

정조는 이들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한 권의 책을 보고자 했다. 이 일을 다산 정약용에게 맡기니 가로 · 세로로 나누어 표 1장으로 만들어 정조께 보고하자 "한권이 아니고서는 상세하게 기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은 장부와 문서를 너는 종이 한 장으로 정리했구나. 참으로 훌륭하다"고 칭찬했다고 ‘다산시문집’에 기록했다. 7년간 현륭원에 심은 나무는 대략 1200만 그루였다. 이는 현륭원 주변의 많은 산에 심어 화산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 내용은 2022년 수원문화원에서 발간한 역사 속의 수원나무, 김은경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현륭원과 신읍조성을 마치고 1794년 정월에 성 쌓기를 시작해 1796년 9월 10일 성역을 모두 마쳤다. 화성성역에 관한 기록은 화성성역의궤 재용(財用) 식목편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성안 매향동, 팔달산, 모든 성벽 안팎, 대천의 양쪽 가장자리와 성밖의 용연, 관길야, 영화정 이북에 매년 봄, 가을에 7차에 걸친 식목과 파종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왕실에서 내려준 단풍 씨앗 만년지 1봉, 비변사에서 온 솔씨 2석, 탱자 1석, 상심 2석 5두, 밤 2석, 상수리 42석 13두 이상의 값 89냥 8전, 오얏나무 7,350주, 복숭아, 살구 등 각색과목 582주 이상의 값 394냥, 연밥 따는 품삯 8냥3전5푼, 화초와 버드나무를 포함해 소나무 캐는데 든 품삯 217냥, 파종 품삯 1080냥, 양미 30석 9두 3승, 값 137냥 7전 9푼, 마소 운임 35냥, 합계 1,961냥 9전 4푼이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뎡리의궤 화성전도. 꽃이 만발한 효원의 도시 모습이다. (자료=수원시)

수원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정신으로 현륭원과 신도시 화성이 건설됐다. 이후 7년간에 걸쳐 수목과 꽃이 울창한 전원도시(효원의 도시)를 만들었다. 오늘날의 수원은 정조시대 축조된 만석거와 축만제 성벽을 쌓기 위해 돌을 뜬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이 공원으로 조성됐다. 면면히 이어지는 ‘효원의 도시 수원’을 더욱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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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98)] 신도시 화성은 영국 전원도시보다 114년 앞서 건설됐 |김충영의현미경

2022-11-2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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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98)] 신도시 화성은 영국 전원도시보다 114년 앞서 건설됐다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김충영 논설위원

  • 승인 2022.11.28 06:00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영국의 전원도시 레치워스 시가지 전경. 1903년 런던 북쪽 60km 지점에 건설한 영국 최초의 전원도시 모습이다. (사진=구굴지도)

전원도시(Garden City)의 등장은 1898년 영국의 도시계획가 에버네저 하워드의 학설에서 시작됐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자 생활환경이 악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결책으로 도시적인 것과 전원적인 것을 융합한 도시만이 이상적인 삶을 영위케 한다고 생각했다.

가든 시티는 정원이 많은 도시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전원 속에 건설된 도시이며, 자급자족 도시를 목표로 하는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전원도시는 규모가 커지면 도시민의 건강도 공동체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워드는 전원도시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도시 인구를 3만의 자급자족 도시를 제시했다. 

둘째 토지는 도시경영 주체가 소유하고, 개인은 임대사용을 원칙으로 하고, 토지공개념 제도를 주장했다.

셋째 도시의 물리적 확장을 억제하고, 식량의 자급자족, 오픈스페이스 확보 등을 위해 도시 주변부에 넓은 농업지대의 보유와 도시 내 충분한 공간확보를 주장했다. 

넷째 시민경제 유지 즉 경제적 자족성을 위한 산업을 유치해야 한다고 했다. 

다섯째 상하수도, 전기, 철도 등을 도시 자체가 해결하고, 도시의 성장과 개발에 따른 이익은 조세감면이나 도시개선을 위해 재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여섯째 시민의 자유와 협동의 권리 향유 등을 제시했다. 

레치워스 지도. 방사형의 도시 모습이다. 중심지에 광장과 공용의 청사, 성당, 공원이 있고 중간지대에 주택과 학교, 외곽에 공장과 창고, 농경지, 철도가 위치하고 있다. (자료=구글지도)

이에 따라 전원도시의 규모는 약 400ha(120만평), 인구는 약 3만2000명 규모, 시가지는 방사형이며, 중심부에 광장과 공용의 청사 등 공공시설이 있고, 중간지대에 주택과 학교, 외곽지대에 공장과 창고, 철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시가지 밖으로는 대농장, 목초지 등 약 2000ha(600만평)의 농업지대가 펼쳐져 인근 도시와 공간적 분리를 유도하고, 도시간 연결은 철도와 도로를 확보하는 이론을 제시했다. 

영국의 최초 전원도시는 1903년 런던에서 약 60km 북동쪽 외곽에 위치한 레치워스(Letchworth)다. 레치워스는 1550ha(465만평)의 대저택을 사들여 도심외곽에 그린벨트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환경보존을 위해 기존에 있던 수목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을 설계했다. 

화성전도. 한글본 뎡리의궤에 수록돼 있다. (사진=수원시)

수원의 신도시 화성은 영국의 경우와는 최초의 출발동기가 다르기는 하나 자족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목표와 접근방식은 비슷함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반계 유형원(1622~1673)은 1670년에 집필한 반계수록에서 “수원부 북쪽 들 가운데 임천의 지세를 보고 생각하건데, 지금의 읍치도 좋기는 하나 북쪽의 들은 산이 크게 굽고 땅이 태평해 농경지가 깊고 넓으며 규모가 크고 멀어서 성을 읍치로 하게 되면 참으로 대번진이 될 수 있다. 그 땅 내외가 가히 1만호는 수용할 것이다” 라고 수원부 신읍의 입지를 내다봤다.

유형원의 주장은 1789년 사도세자의 묘 이장이 결정되면서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묘 이장지가 수원부의 읍소재지 뒷산에 위치해 구읍을 이전해야 했는데 이미 유형원이 119년 전에 구읍의 이전지를 지목했기에 신읍건설이 가능했다. 

1789년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조성한 후 화성축성은 4년이 지난 1794년 정월에 시작하여 1796년 9월 10일 완공됐다. 정조와 총리대신 채제공은 신읍의 번영책을 다방면으로 구상하게 된다. 

영국의 전원도시와 수원화성 신도시 비교. (자료=김충영 필자)

정조는 신도시 화성을 도성을 방어하면서 상업과 농업이 번성한 자족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주민과 상인 유치를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신읍이 조성된 이후인 정조 14년(1790) 2월 좌의정 채제공의 발의로 신읍에 부자들과 백성을 모아들이는 방안을 논의했다. 

먼저 도회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서울의 부자 30여 호에게 무이자로 1000냥씩 빌려주어 이들이 수원에서 시전을 짓고 장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수원과 그 부근에 5일장을 설치해 장시를 상설화하고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면 사방의 상인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면 읍치의 면모가 바뀌게 될 것임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수원부사 조심태는 구체적인 상업 진흥책을 제시했다. 전국에서 부호를 모아 시전을 설치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으므로 수원지역 사람들 중 여유 있고 장사를 잘 아는 사람을 택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에게 자본금을 빌려주어 이익을 얻어 살게 함이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중앙정부에서 6만5000냥을 3년을 기한으로 지원해줬다. 이런 노력으로 상업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자 수원은 자급자족의 경제 활동이 가능한 상업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신읍조성 후 3년이 경과된 1792년에 편찬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화성행궁의 정문인 진남루(신풍루)앞 대로 좌우에 여덟 종류의 시전이 들어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로북쪽에는 입색전(비단파는 가게)과 어물전, 도로남쪽에는 목포전(모시, 무명, 목화를 파는 가게), 상전(소금과 일용잡화 가게), 도로 동쪽에는 미곡전, 관곽전(관과 궤인곽을 파는 가게), 지혜전(종이와 신발 가게), 읍내북쪽에 유철전(놋쇠와 쇠를 파는 가게) 등이 중심의 네거리 중 행궁 쪽을 제외하고 시전이 설치돼 운영됐다. 

또한 1794년(정조18) 한해가 심하게 들어 온 나라가 어렵게 되자 정조는 성역을 중지하면서 생계를 마련하도록 명했다. 그해 11월 정조는 윤음(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을 내려 이르기를 북성 밖 척박한 땅을 개간할 것을 명하고 그 공사도 날품으로 하지 말고 일한 양에 따라 품삯을 주는 방안을 택하도록 했다. 

영화정도. 영화정 앞에 보이는 것이 만석거이다. 아래쪽으로 여의교가 보인다. 하류지역이 대유둔(대유평)이다. (자료=수원시)

화성유수 조심태는 1795년 윤2월 을묘원행으로 내려온 정조에게 개간 방안을 보고하고 곧 만석거 조성공사 시행에 들어갔다. 1796년 정월에 화성을 들러 만석거를 둘러본 정조는 "수문의 석각은 하늘이 이뤄 놓은 것이니 어찌 사람의 힘이 이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늘로부터 도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도다"했다.

만석거를 축조 한 후 정조 21년과 22년 연이어 발생한 재해에서 수원지방은 극심한 가뭄을 이겨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만년제와 축만제를 추가로 만들고 순조 대에는 남제를 축조했다. 

만석거 주변의 대유둔은 66섬지기(1섬지기는 2천평~3천평), 만년제 주변은 62섬지기, 축만제 주변은 232섬지기라고 19세기말 수원부 읍지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자급자족 도시의 기반이 마련됐다.

신읍 화성의 조성은 사도세자 묘 이장이 발단이었으나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영국의 전원도시의 기능과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신도시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신도시 화성의 정신을 이어 받아 자족도시를 건설하는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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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97)] ‘화성기적 비문’을 읽고 나면 화성 가이드 끝!- ( |김충영의현미경

2022-11-2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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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97)] ‘화성기적 비문’을 읽고 나면 화성 가이드 끝!-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박사)

  • 김충영 논설위원
  • 승인 2022.11.21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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